<신용우 칼럼> 고조선과 진국(辰國; 삼한), 동·북부여, 고구려의 상관관계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제20회)

조원익 기자
wicknews1@naver.com | 2020-05-22 13: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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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고조선의 삼조선이 분리되면서 삼조선 중 가장 남쪽 즉 한반도의 북부에 있던 말조선은 마한으로 국호를 바꿨다. 이것은 고조선이 만주에서 부여와 고구려를 통해서 우리민족의 역사로 이어졌다면 한반도에서는 마한을 통해서 그 맥을 이은 것이다. 말조선이 마한으로 국호를 변경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기록이 의심할 여지없이 뒷받침해준다.


불조선은 기원전 323년경에 기씨가 왕이 되기 시작하였다. 식민사관에서 흔히 기자조선이라고 한 것은 고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쳐 온 것은 상나라가 주나라에게 멸망한 때이니 기원전 11세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기자가 곧바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불조선에 살던 그 후손이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서 비로소 왕위에 오른 것일 뿐이다. 따라서 기자조선은 존재하지 않았고 불조선에서 기씨가 왕으로 재위하던 시절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씨가 왕위를 이어가다가, 기원전 194년에 기준왕이 한나라의 위만이 귀화를 요청하자 받아 주었다. 그런데 위만이 배신을 하여 기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다. 이것이 식민사관에서 일컫는 위만조선인데 이 역시 불조선으로 왕의 성씨가 위만으로 바뀐 것뿐이다.


기준왕이 기원전 2세기 초에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망명한 곳이 마한이다. '후한서' 「동이열전 한」편에 “과거에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準)의 후손(後孫)이 절멸(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自立)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이미 그곳에 마한은 존재했기 때문에 기준왕이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신조선이나 번조선의 유민들은 상당 수 말조선이 이름을 바꾼 마한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그에 따라서 진한과 변한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면서 점점 남쪽으로의 이동이 불가피 하였을 것이고, 남쪽으로 진출한 삼한은 이미 반도 남쪽에 자리 잡고 있던 세력과 연합하여 다시 진국이라는 연합국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종주국이 신조선이 아니었다. 이미 단군신앙도 붕괴된 이후이므로, 고조선시대부터 평양을 수도로 해서 한반도에 터전을 잡고 있던, 말조선에서 국호를 바꾼 마한이 주도권을 잡은 진국의 최강자로서 ‘마한국 진왕’이라고 함으로써, 마한 왕이 진국의 왕을 겸했던 것이다.

'후한서'에 의하면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로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가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이다.

마한이 한족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삼국지』에는 ‘월지국(月支國)’으로 기록됨)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한다.”고 했다. 이렇게 연합국으로 삼한 체제를 유지한 점이나 삼한의 각 국명이 고조선의 삼한과 동일한 것은, 남삼한이라 일컫는 진국이 고조선의 유민들에 의해서 고조선을 계승하여, 그 맥을 잊는 국가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진국의 진정한 의미는 고조선의 후손인 우리민족이 만주는 물론 한반도까지 그 역사와 문화의 단절 없이 동일한 문화를 누리며 공생했다는 것을 실증해주는 귀중한 역사상의 존재라는 것이다.
한편, 고조선의 멸망이 진국으로 이어진데 반하여, 동부여는 고구려에 의해 병합되었다. 북동부여, 즉 북옥저는 기원전 112년에 그리고 남동부여, 즉 남옥저는 문자왕 3년인 494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북한 김병룡의 「후부여(부여봉건국가)의 형성과 그 력사적 변천」에 의하면 “모용선비가 강한 세력으로 자라나 337년 국호를 ‘연(전연)’이라 하고 346년 1만7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북부여를 침공하여 북부여왕 현을 포함한 5만 명의 인질을 잡아 끌고 갔다. 이렇게 큰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북부여가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되자 고구려가 북부여지역으로 진출하여 북부여를 통합하고 동부여만 남았다.

그런데 부여가 약해지면서 부여가 예속하고 있던 ‘읍루’마저 부여의 예속을 벗어나 자신들의 족명을 ‘물길’이라 바꾸고 동부여를 공격하여 병탄하려고 하자 494년 2월 동부여의 왕은 고구려에 나라를 바치고 투항함으로써 부여의 존재는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부여는 고구려에 병합되었으므로 만주에서는 부여와 같은 민족인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한 것이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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