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흙을 지킨 사람들의 날
고기훈 기자
imkhun@naver.com | 2026-11-06 10:03:07
수도권 2천만 명이 아침에 트는 수돗물은 팔당호에서 온다. 그 물가에는 51년째 농약을 쓰지 못하는 논밭이 있다. 광주의 퇴촌과 남종, 남한산성과 초월이다. 11월 11일 농업인의 날은 흙 토(土) 자를 풀어 쓰면 십일(十一)이 된다는 데서 왔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날이다. 1996년 법정기념일로 정해진 이래 올해로 서른한 번째를 맞는다. 광주에서 이 날이 조금 더 특별한 무게를 갖는 것은, 광주의 흙이 반세기 동안 농사를 짓는 땅이면서 동시에 수도권의 물을 지키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1975년 7월 9일, 정부는 광주와 남양주, 양평, 하남 일대를 팔당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그날 이후 보호구역 안의 농민들은 남들과 다른 조건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 왔다. 논밭에 화학 농약을 쓸 수 없었고, 집을 늘려 지을 수 없었으며, 농사가 안 되는 해에 식당 하나 열 수도 없었다.
규제는 겹겹이 쌓였다. 1990년에는 특별대책지역이, 1999년에는 수변구역이 그 위에 얹혔다. 2001년 정부가 하천구역 안의 경작까지 금지하려 했을 때 남종과 퇴촌의 농민들은 "휴경지에 농작물을 심어 쌀 한 톨이라도 수확하려는 농민의 생존권"을 지켜 달라고 호소해야 했다. 수도권의 물은 그렇게 지켜졌다. 그 물을 지킨 사람 가운데 농민이 있었고, 마신 사람은 2천만 명이었다.
그런데 그 규제가 광주 농업의 자산이 됐다. 퇴촌 토마토가 그 증거다. 퇴촌면은 상수원보호구역이어서 화학 농약을 쓸 수 없다. 농민들은 광주시 농업기술센터가 배양해 무료로 공급하는 유용 미생물로 땅을 살리는 길을 택했고, 그렇게 키운 토마토는 광주를 대표하는 친환경 농산물이 됐다. 매년 6월 열리는 퇴촌 토마토 축제는 농가 매출의 20~30%를 책임지는 판로가 됐고, 올해로 24회를 맞았다. 올해 축제에서는 규격이 맞지 않아 팔리지 않던 '못난이 토마토'로 요리 경연을 열었다. 버려지던 것이 상품이 되고, 규제가 브랜드가 됐다. 규제 때문에 농약을 쓰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규제 속에서 농약 없이 키우는 법을 익힌 것이다. 광주의 농업은 희생의 부산물이 아니라 희생이 만들어 낸 자산이다.
흙을 만져 본 사람은 안다. 농사는 한 해를 걸고 하는 일이고, 날씨와 가격과 제도 가운데 농민이 정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농업인의 날은 격려의 날이기 전에 책임의 날이어야 한다. 농민이 정할 수 없는 것들을 행정이 어떻게 받쳐 줄 것인가의 날이다.
광주시는 세 가지로 답하고자 한다. 첫째는 소득이다. 경기도와 함께 시행하는 농어민 기회소득은 청년·귀농·환경 농어민에게 월 15만 원, 일반 농어민에게 월 5만 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한다. 친환경 인증을 받은 광주의 농가가 '환경 농어민'으로 더 두터운 지원을 받는 구조다. 둘째는 판로다. 양벌동 자연채 푸드팜센터의 로컬푸드 직매장은 중소 가족농과 고령농, 귀농인의 농산물이 시민의 식탁에 바로 오르는 통로이며, 민선 9기는 농민 소득 증대와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로컬푸드 확대를 약속했다. 셋째는 규제 안에서 사는 폭이다. 상수원보호구역 안에서도 주민이 살 수 있도록 하는 환경정비구역은 2012년 27개 마을에서 시작해, 초월·퇴촌·남종·남한산성면의 43개 자연부락으로 넓히는 절차를 밟아 왔다. 규제를 없앨 수 없다면 규제 안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폭을 넓히는 것이 시의 일이다.
그러나 규제의 주인은 시가 아니라 국가다. 규제를 완화하자고 하면 곧바로 수질 걱정이 따라오지만, 51년 동안 그 수질을 몸으로 지켜 온 당사자가 바로 이 농민들이다. 보상의 재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수도권 시민이 수도요금에 얹어 내는 한강 수계 물이용부담금은 연간 수천억 원 규모이고, 그 일부는 주민지원사업으로 규제 지역에 돌아온다. 다만 마을 단위의 간접 지원일 뿐, 농약을 쓰지 못하고 집을 늘리지 못한 개별 농민의 손실에 직접 닿는 구조는 아니었다. 그 구조가 바뀌지 않은 채로, 광주는 지금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에 보낼 공업용수 관로를 또 한 번 받아들이도록 요구받고 있다. 광주시가 정부에 "특별한 희생에는 특별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희생을 가장 오래 감당해 온 사람이 팔당을 지켜 온 농민이므로, 반도체 상생의 첫 번째 수혜자도 이들이어야 한다. 중첩규제 개선은 공장을 짓기 위한 요구이기 전에, 51년간 농사를 지어 온 사람들에게 보통의 권리를 돌려주기 위한 요구다.
흙을 지킨 사람들의 날이다. 내일 아침 수도권의 어느 집에서 수돗물을 틀 때, 그 물이 지나온 논밭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광주시는 기억한다. 광주의 흙은 수도권의 물을 지켰고, 그 흙을 지킨 것은 농민이었다. 농민이 흙을 지켰듯, 이제 광주시가 농민을 지킬 차례다.
박관열 광주시장
[ⓒ 로컬(LOCAL)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