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아의 아버지 가미쿠리 요리토, 그는 고아 2000명을 자식으로 키웠다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2-08-24 10:08:27

▲ 고아원 설립 당시에 가미쿠리 원장이 원아들과 함께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놀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가운데 가미쿠리 요리토 원장. 사진 히로시마 신생학원 제공.

[로컬세계 = 이승민 특파원] 가미쿠리 요리토는 고아 2000명을 자식으로 길러 일본 고아의 아버지로 불렸다. 

부모 잃은 아이들을 모아 아들 딸로 삼아 기른 그는 어떤 사람일까.

가미쿠리의 고아 사랑 이야기는 7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6 일 오전 8시 15분, 항구도시 히로시마에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도시는 순식간에 초토화되었고 7만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후 7만명이 또 사망했다. 

단 한 발의 폭탄으로 당시 히로시마 인구 35만 명 중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반경 1.6km 이내의 모든 건물들이 잿더미가 되었고 반경 11 km가 불바다로 변했다. 이 지역 병원들이 모두 파괴되었고 의사 간호사들도 죽었다. 긴급 환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한순간에 부모와 집을 잃고 오갈곳 없는 고아 5천명이 발생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고아들은 울면서 엄마를 찾았고 파괴된 도시를 떠돌았다. 이 때 고아원을 만들어 불쌍한 아이들과 한평생 같이 살기를 결심한 사람이 있었다. 26살의 청년 가미쿠리 요리토(上栗頼登26) 라는 육군 병사였다.

▲ 1945년, 원폭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한 당시의 육군 병사 가미쿠리 요리토.

아직 군인이었던 가미쿠리, 그가 고아원을 설립하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가미쿠리는 하룻밤의 휴가를 받아 히로시마 교외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8월 5일이 그의 생사를 바꿔놓았다. 다음날 아침. 하늘을 찌르는 강렬한 빛, 이글거리는 태양이 떨어진 듯 뜨거운 열, 그리고 공포의 폭풍을 경험한다. 폭풍이 잠들자 가미쿠리는 군복으로 갈아 입고 히로시마 중심부에 있는 부대로 향했다.

원폭 현장은 지옥보다 비참했다. 피폭자들의 옷은 탔고 피부는 물론 뼈까지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직 숨쉬고 있는 사람들은 물을 달라고 애원했다. 크게 화상이나 상처를 입은 사람이 물을 마시면 죽는다고 배웠기에 물통을 숨겼다.

집에서 1km 이상을 걸어 요코가와 다리(横川橋)를 건너갈 때였다. 다리 밑에서 힘도 없이 우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엄마의 젖가슴 위에서 갓난아기가 울고 있었다. 아기는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미어졌다. 울다 지친 아기 입에 물 한 모금 넣어 주었다. 타들어가던 목에 물을 축인 아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미쿠리는 아기를 안고 울었다.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병사 4만명이 주둔했던 군부대는 형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의 신음소리, 물을 달라고 몸부림치는 사람들, 고통을 못 참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중환자들, 애절한 현장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지옥 속을 걸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머리속은 피폭 현장을 떠날 수가 있었다. 그렇게도 마시고 싶은 물을 내가 왜 안줬을까. 죽기 전 물 한 모금이라도 먹였어야 했는데. 후회가 태풍처럼 몰려왔다. 죽은 엄마의 젖가슴을 잡고 울던 간난아기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가미쿠리는 하루의 일들을 일기에 적었다.

며칠 후 피폭자들을 위한 인양선들이 차례차례로 히로시마 항구로 들어왔다. 집이 파괴되어 갈 곳 없는 환자들을 모아 수용소로 이동시킬뿐 예산이 없는 정부는 인양자들의 생활 지원에는 대책이 없었다.

부모와 집을 잃고 부둣가를 떠도는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찔렸다. 다리 밑에서 죽어가던 갓난아기가 다시 떠올랐다. 가미쿠리는 오갈데 없는 불쌍한 아이들을 보면서 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하룻밤 휴가를 나와 만사일생(萬死一生) 살아남았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내 인생, 한평생 아이들을 위해 살자.

곧바로 군 제대 신청을 했고 퇴직금 2000엔을 받아 구 육군 부대의 막사를 빌렸다. 동료 병사들의 도움으로 인양고아수용소(引揚孤児収容所)를 개설했다. 정부 시책에 의해 수용소로 이동될 고아들을 인수받은 것이다.

고아원 개설 후 2개월 만에 원아 수는 220명으로 늘었고 영양실조나 질병으로 40명이 사망했다. 그 중에는 이름 없이 죽은 어린 아기도 있었다. 항상 배 고프고 추운 고아원이었다. 하지만 갈 곳 없는 아이들은 계속 찾아왔다. 날이 갈 수록 고아 수는 늘어났다. 시설도 좁아져 갔고 작은 담요 1장에 3명이 잤다.

당시 전쟁이 끝난 일본 국토는 폐허의 땅이었다. 전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원폭과 그 잔해가 남아 있는 히로시마의 형편은 더 어려웠다. 영양실조나 폐렴으로 사망하는 아이들이 늘어났지만 아이들에게 치료를 요청하거나 약이나 먹을 것을 부탁할 곳이 없었다.


▲ 전후 어려웠던 당시의 고아원 일지.

당시 원아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가미쿠리 원장의 일지가 고아원에 남아 있다.


‘추위가 하루하루 심해진다. 어떻게든 식사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종일 굶기고 있다. 아이들이 배고파 울고 있다. 추워서 떨고 있다. 내 옷을 벗어 아이들에게 입힐 수만 있다면 당장 옷을 모두 벗어 입혀주고 싶다.’

‘따뜻한 가족의 사랑이 갈급한 고아들이다.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어야 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고독과 절망뿐 사랑도 희망도 사치였다.’

아이들은 매일 죽어갔다. 가미쿠리 원장은 고아원에 납골당을 지어 원아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하루하루 생존의 위기속에서 살아야 하는 아이들은 이기심으로 변해갔고 성격도 날카로워져갔다. 학교에 가면 고아라는 이유로 동급생이나 학부모에게까지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가미쿠리 원장은 아직 20대 총각이었고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었다. 원장의 고민은 깊어 갔다. 가정을 잃고 부모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이 너무도 불쌍했다. 졸원을 하고 사회에 나가 또다시 괴롭힘을 당한다면 홀로 일어서기 어렵다. 희망과 꿈을 펼칠 수 있는 무기는 오직 배움뿐이다.

가미쿠리 원장은 경제적인 족쇄(足鎖), 고아(孤兒)라는 이름표 등 냉정한 현실 속에서 오직 교육만이 살길이다는 각오 하나로 밀고 나갔다. 전후 폐허가 된 시대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도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관청이나 교육청 등을 찾아다니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다.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고등학교까지 입학시켰다. 어느 날 고등학교 교장으로부터 불려간 가미쿠리 원장은 교장과 큰 싸움을 했다.
"고아에게 고등학교는 사치스럽다"는 교장의 말 때문이었다.  

▲ 히로시마 성 옆에 있던 고아원을 이전하여 학교 건물처럼 신축한 히로시마 신생학원 건물 전경.


가미쿠리 원장은 아이들에게 '배워야 산다'는 생각을 머리속에 각인시켜주었고, 학습 의욕을 유발하도록 환경을 꾸며 직접 학습지도를 했다. 학력 증진과 함께 생활 규칙 지도, 올바른 생활 습관 등을 교육시켰고 전문가에 의한 개인 상담도 실시했다.

원장의 노력은 아이들을 감동시켰다. 그토록 세상을 원망하고 반항심과 이기심에 가득찼던 아이들이 바뀌어 갔다. 아버지 사랑과 스승의 사랑을 함께 느낀 아이들은 고아원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게 됐고 원장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고아원은 커다란 가정집이 되었고 하나의 대가족이 되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공부하는 아이, 고아원의 운영을 돕기 위해 밖으로 나가 일하는 아이, 밭을 일구어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짓는 아이, 강가에 가서 붕어나 메기 등 물고기를 낚아 오는 아이...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고아원 자립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 배고프고 춥게 살아도 존경하는 아버지가 있어 늘 웃고 사는 신생학원 원아들.

또 가미쿠리 원장은 고아원 창설 때부터 스포츠 활동에 의한 집단지도에 힘을 쏟았다. 아이들 건강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고 스포츠의 다양한 효과 때문이다. 마음껏 뛰어놀고 운동할 수 있도록 마당이 넓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 원내에 가로 80m, 세로 90m의 야구장과 야외 배구장을 만들었다.

원아들은 하교 후, 남자는 소프트볼이나 연식 야구를, 여자는 배구를 실시하는 것을 일과로 하여 심신을 강하게 훈련시켰다. 스포츠 활동을 통해 협조성, 준법성, 책임감, 인내력, 자신감 등을 길러주었고 체력과 더불어 예절을 가르쳤다.

고아원이란 잃어버린 가정을 되찾아주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항상 웃음을 선물해주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랑으로 호흡할 수 있도록 따뜻한 정으로 보살폈다. 수백명 원아들의 생일을 일일이 챙겨주었고 봄에는 벚꽃놀이, 여름에는 강물놀이, 가을에는 산으로 가서 도토리, 밤 등을 줍게 하면서 아이들의 즐거움을 위해 노력했다.

원외에서 고아들을 소개할 때면 언제나 나의 아들과 딸이라고 소개하며 아이들 자랑을 많이 했다. 또 여러번 이사하면서 간판을 바꿨지만 한 번도 '고아원'이라는 간판을 붙이지 않았다. 배움의 집이라는 의미를 강조하여 지금도 히로시마 신생학원(広島新生学園)이라는 원명을 붙여놓고 있다.

가미쿠리 원장은 또 신생학원 만의 문화를 만들어갔다. 매년 추석과 설날에는 사회로 배출한 졸원생들도 고향집(신생학원)에 돌아와 원내 아이들이 함께 신생학원 돌기를 하고 원아와 졸원자 간에 야구대회 홍백전을 한다.

학원 내에는 위령비가 있다. 중앙 삼각석은 히로시마, 양 날개는 평화의 비둘기를 상징했다. 비석에는 원폭 투하로 어머니의 젖가슴 위에서 죽은 아기, 목말라 몸부림치는 희생자들의 통한이 비문에 새겨져 있다.

피폭 질병이 악화돼 고아원에서 죽은 원아, 또 졸원(卒園) 후 죽은 졸원자 등을 위령 대상으로 하고 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8월 6일을 추모일로 삼아 매년 공양제(供養祭)를 실시하고 있다.

또 신생원에는 도박 단체로부터의 기부는 받지 않는 문화가 있다. 빠친코를 비롯한 도박 단체나 도박 기업들의 기부는 일절 받지 않는다. 도박은 가정의 붕괴를 초래하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들의 기부금을 받는 것 자체가 아이들 교육에 절대 좋지 않다는 것이 이유다.

그렇게 원아들을 친자식으로 삼아 먹이고 가르치면서 살아온 가미쿠리 요리토(1919-1995). 그는 1945년 잿더미 속에서 고아원을 설립, 반세기에 걸쳐 아버지의 사랑을 베풀다가 1995년 76세에 생을 마감한다. 그가 26세에 고아의 아버지가 되어 50년 동안 정성을 다해 키우고, 정과 꿈으로 가르쳐 사회의 일꾼으로 배출시킨 고아 수는 2000명을 헤아렸다.

초등학교 교장이 된 고아원 출신도 있었다. 교장이 된 시라이시 하루오(白石春雄)는 “가미쿠리 원장님은 나를 사랑으로 키워주시고 가르쳐 주신 나의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내 인생의 전부다”고 말하면서 지갑을 보여주었다. 지갑 속에는 고이 간직한 가미쿠리 원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가미쿠리 원장이 세운 히로시마 신생학원(広島新生学園)은 지금도 배움의 집, 체육의 집, 문화의 집을 전통으로 삼아, 현재 45명의 고아들과 함께 그의 장남 테츠오(哲男 73)가 아버지 유지를 받들어 고아들의 보금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 가미쿠리 요리토 원장의 장남 테츠오(哲男 73) 씨가 원내에 있는 아버지의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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