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우 칼럼] 고구려 건국 연도의 기원전 277년론(論)과 모순점-만주의 영토권(Ⅴ)

마나미 기자

| 2024-05-01 15:05:02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북한의 손영종 역시 고구려 역사가 삭감되었으므로 건국연대를 소급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1990년 '력사과학'에 「고구려 건국년대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을 통해 고구려 건국 연도는 기원전 277년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 북한은 공식적으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통일하여 교과서에 수록하고 그렇게 교육하고 있다.


그는 광개토대왕 능비에 광개토대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12세손이라고 했다는 점을 부각하여 삭감된 5세손을 규명하기 위해서 '위서'와 '북사'에 주몽의 아들, 손자, 증손자로서 시려해(여달), 여률, 막래의 이름이 나오고 그들이 차례로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기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이론을 펼쳤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유리명왕의 이름이 유리 또는 유류라고 하였고, 광개토태왕 능비에는 추모왕의 태자 이름이 유류라고 되어있다. '삼국사기' 유리왕조에 유류왕 때의 사실을 함께 기록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대주류왕과 대무신왕은 그들의 재위 연간에 있었던 부여 정벌에서 공통성이 있고, ‘막래-무휼, 미류’ 사이에도 유사성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두 왕대의 사실을 대무신왕조에 압축하여 기록했다고 보인다. 여률왕의 경우에는 통치 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서 유리왕에 포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주류왕의 아들도 모본왕(대무신왕의 아들)의 이름이 ‘해우’ 혹은 ‘해애루’라고 기록된 점에서 ‘애루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누락시킨 다섯의 왕 중에서 유류, 여률, 막래, 애루 등 네 명은 찾아낸 것이다. 유류, 여률, 막래왕은 3세대=3왕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찾아내지 못한 한 명의 왕을 포함한 5세대의 왕들의 재위 기간은 '삼국사기' 연표에서 유리왕부터 5세대가 되는 동천왕까지 10명으로, 기원전 19년에서 248년까지 267년이다. 그리고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연도는, '구삼국사',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 한결같이 갑신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어느 갑신년에 건국하였는가를 따져보면 된다. 

고구려가 기원전 221년경에는 진나라와 직접적인 경계를 가지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몇 해 후에는 직접적인 경계를 접하게 된 것이 확실하므로, 고구려가 건국한 것은 기원전 221년 이전의 갑신년인 기원전 277년과 기원전 337년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337년은 이제까지 전해진 고구려 건국연대인 기원전 37년에 비해 300년이나 앞서게 되므로 5세대의 재위 기간인 267년보다 현저하게 길다. 

그러나 기원전 277년으로 본다면 고구려의 존립기간은 945년으로 <유국 900년 설>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5세손의 재위 기간인 267년보다 27년이 짧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연대는 기원전 277년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손영종의 이론은 무리한 설정으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먼저 5세손의 왕들의 재위 연수를 구한다고 5세손 10명의 재위 연수를 합산한 것 자체가 무리다. 손영종 자신이 누락시킨 다섯 명의 왕 중에서 유류, 여률, 막래왕은 3세대=3왕대로 되었다고 서술함으로써 이미 3세대는 3명이다. 나머지 2세손의 재위 연수를 7명의 왕 재위 연수를 합산해서 산출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확실한 무리다. 애루왕까지 네 명은 찾아냈다고 했으니, 5세손이라는 세손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찾지 못한 왕을 찾아내어 재위 연수를 합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고구려와 진나라가 국경을 마주했다는 설정이다. 손영종 자신이 같은 논문에 연나라가 고조선과 국경을 마주하다가 기원전 221년에는 진나라가 고조선과 국경을 마주했다고 써 놓고도 오류를 범한 것이다. 고조선의 판도는 이병도・최태영 공저인 '한국상고사입문'에 실린 지도에 신채호의 이론에 따라서 삼 조선으로 이루어진 고조선 각각의 이름을 표기한 [그림 1]과 같은 것으로, 진나라와 국경을 마주한 고조선은 위만이 번조선에서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위만조선이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한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그림 ] 고조선의 영역과 고구려 첫 수도인 북진 의무려산

'삼국지'「위서」「동이전」에, ‘한 무제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한사군을 설치하였다’라고 했다. 결국 위만조선도 한나라 시대가 되어서야 중국의 침략을 받은 것이고, 한나라 이전의 진나라와 국경을 마주한 것은 위만조선으로 고구려는 진나라와 국경을 마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간과하고, 기원전 221년 전의 갑신년에 얽매여 기원전 277년과 기원전 337년을 가지고 물건 흥정하듯이 277년으로 정하는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세 번째로 고구려가 945년 동안 존립한 것이 유국 900년에 가깝다고 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역사를 이야기할 때, 945년은 900년을 훨씬 넘겼다거나 1,000년에 가깝다고 하지 900년에 가깝다고 하지 않는다. 결국 손영종의 몇 가지 오류로 인해서 고구려 건국 연도가 기원전 277년이 아니라, 새롭게 비정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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