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산책 ⑤] 진보초(神保町)와 간다(神田)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4-12 20:03:17

이름에 새겨진 무사의 흔적
북향(北向)의 미학, 책을 향한 지극한 예우
기묘한 전문 서점들과 몰입의 즐거움
활자의 휴식처와 카레의 성지
보존과 변화, 시간의 켜가 쌓인 골목
간다(神田)라는 이름 '신에게 바치는 논' 
도쿄 진보초 고서점, 책방 거리의 고즈넉한 분위기. 사진 이승민 특파원.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도쿄의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오직 '종이와 활자'가 주인공인 마을이 있다. 바로 진보초(神保町)다. 이곳은 180여 개의 서점이 밀집해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서점 거리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쿄의 지성과 낭만을 지탱해 온 '지식의 방주'와 같다.

1. 이름에 새겨진 무사의 흔적: 진보 나가하루(神保長治) 

오늘날 ‘책의 거리’로 불리는 이곳의 지명에는 의외로 무(武)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진보초라는 이름은 에도 시대의 하타모토(쇼군을 직접 모시던 무사)인 진보 나가하루(神保長治)의 저택이 있던 데에서 유래했다.

당시 이 일대는 진보 가문을 비롯해 여러 무가의 저택이 늘어섰던 엄숙한 지역이었다. 1872년 에도가 도쿄부로 바뀌고 1889년 도쿄시가 발족하며 ‘도쿄시 간다구’ 소속이 되는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쳤다.

1947년 간다구와 고지마치구가 합병해 지요다구가 되었고, 이때 기존 간다구 소속 마을 이름 앞에 ‘간다’를 붙이면서 오늘날의 ‘간다진보초(神田神保町)’라는 이름이 완성되었다. 무사의 칼날이 머물던 자리는 그렇게 학자들의 붓끝이 머무는 곳으로 변모했다.

2. 북향(北向)의 미학: 책을 향한 지극한 예우 

진보초의 고서점가를 걷다 보면 대부분의 주요 서점이 길의 한쪽 면, 즉 북쪽을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소중한 고서들이 직사광선에 바래지 않도록 배려한 서점 주인들의 오랜 지혜다. 태양마저 등지게 한 채 책을 보존하려는 이 지독한 장인정신 덕분에, 우리는 백 년 전의 초판본을 오늘날에도 생생한 빛깔로 마주한다. 무사들이 가문의 명예를 지켰듯, 이곳의 주인들은 활자의 생명을 지켜내고 있는 셈이다.

기묘한 전문 서점들과 몰입의 즐거움

진보초는 단순히 '중고 책'을 파는 곳이 아니다. 집집마다 그 결이 놀라울 정도로 세분화되어 있다.

영화와 연극: 수십 년 전의 영화 팸플릿과 연극 대본만 전문으로 다루는 곳.

고지도와 판화: 에도 시대의 지도나 우키요에(浮世絵) 원본을 보물찾기하듯 만나는 곳.

외서와 철학: 독일어, 프랑스어 원서를 산더미처럼 쌓아둔 서점들.

산책자는 이곳에서 자신의 취향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 시험받는다. 굳이 책을 사지 않더라도, 세월의 때가 묻은 책등을 손가락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충만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3. 활자의 휴식처와 카레의 성지 

진보초를 완성하는 것은 8할이 커피와 카레다. 1880년대 주변에 대학들이 들어서며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한 손에 책을 든 채 숟가락만으로 식사를 해결하려던 학생들의 습성이 이곳을 일본 최고의 카레 성지로 만들었다.

식후에는 ‘라도리오(Ladorio)’나 ‘밀롱가 누에바(Milonga Nueva)’ 같은 오래된 다방(깃사텐)에 앉아 갓 구입한 책의 첫 장을 넘기는 것이 진보초 산책의 정석이다. 스마트폰 알림음 대신 종이 넘기는 소리와 설탕 스푼이 잔에 부딪히는 맑은 소리만이 공기를 채우는 이곳은,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몰입의 즐거움'을 되찾아준다.

4. 보존과 변화: 시간의 켜가 쌓인 골목 

최근 랜드마크인 산세이도(三省堂) 본점이 재건축에 들어가는 등 변화의 바람도 불고 있다. 누군가는 아쉬워하지만, 진보초는 늘 그래왔듯 낡은 것 위에 새로운 지식을 쌓아 올릴 것이다. 거대한 현대식 빌딩이 들어서도 그 아래 작은 골목의 헌책방들은 여전히 낮은 천장 아래에서 묵직한 종이 냄새를 풍기며 자리를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간다(神田), 에도의 드높은 기상과 장인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골목

도쿄의 가장 오래되고 활기찬 심장부 중 하나인 간다(神田)로 발걸음을 옮긴다. 진보초가 낡은 종이 냄새가 매력적인 '사색과 지성의 공간'이라면, 간다는 땀방울과 활기, 그리고 켜켜이 쌓인 에도의 기질이 살아 숨 쉬는 '역동의 공간'이다.

1. 간다(神田)라는 이름에 담긴 뜻: '신에게 바치는 논'

'간다'라는 지명은 '신전(神田, 신에게 바치는 신성한 논)'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약 천 년 전, 이곳에 도쿄의 수호신인 간다 묘진(神田明神) 신사에 바칠 쌀을 재배하는 성스러운 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에도 시대에 접어들며 간다는 변화를 맞이한다. 쇼군이 거주하던 에도성 바로 동쪽에 위치한 덕분에, 성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수많은 상인과 장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에돗코(江戸っ子, 도쿄 토박이)'라 부르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심과 화끈하고 솔직담백한 성정으로 에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무사의 엄격함 대신 서민들의 왁자지껄한 생명력이 뿌리내린 '시타마치(下町)'의 자부심이 바로 이 간다에서 시작된 셈이다.

2. 간다 묘진(神田明神): 에도의 수호신과 축제의 열기 

간다를 이야기할 때 그 중심에 서 있는 간다 묘진을 빼놓을 수 없다. 1,300년의 역사를 지닌 이곳은 에도 막부 시절부터 '에도의 총수호신'으로 추앙받으며 도쿄의 안녕과 번영을 지켜왔다.

특히 2년에 한 번 열리는 '간다 마츠리(神田祭)'는 간다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정점이다. 평소 고요하던 골목이 수십 개의 가마(미코시)와 거대한 인파의 함성으로 가득 차는 모습은 에돗코들의 뜨거운 기상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오래된 신사가 지독할 정도로 유연하다는 것이다. 

인근 아키하바라의 특성을 반영해 컴퓨터 바이러스를 막아준다는 'IT 정보보호 부적'을 판매하는 모습은, 전통을 박제하지 않고 시대와 호흡하며 진화시키는 일본 특유의 실용 정신을 보여준다.

3. 성(聖)과 속(俗)의 조화: 유시마 세이도와 니콜라이 당 

간다 골목을 조금만 벗어나면 묘한 긴장감을 주는 두 건축물이 대치하듯 서 있다. 검은 옻칠로 마감되어 장엄하고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유시마 세이도(湯島聖堂)는 도쿠가와 막부가 유교를 장려하기 위해 세운 공자묘다.

이곳이 동양의 엄격한 도덕과 학문의 정점이라면, 불과 수백 미터 거리에는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돔을 가진 러시아 정교회 니콜라이 당이 우뚝 서 있다.

엄숙한 유교 정신과 이국적인 기독교 건축이 한 동네에 이웃하고 있는 풍경은 기이하면서도 조화롭다. 이는 외래의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자신들의 풍경으로 녹여내는 도쿄의 유연한 포용력을 상징하는 듯하다.

4. 장인 정신이 깃든 맛과 멋: 간다의 노포와 공방 

에돗코들의 활기찬 일상을 책임지던 간다에는 수십 년, 심지어 수백 년 된 노포들과 장인들의 공방이 즐비하다.

간다 묘진 앞 노포: 1830년 창업한 아마자케(감술) 전문점 '아마노야'를 비롯해 오래된 과자점, 기념품 가게들이 축제의 흥겨움을 간직하고 있다.

장인 공방: 칠기, 염색, 도자기 등 에도의 기술을 이어오는 장인들의 공방에서 그들의 땀방울과 정성을 느낄 수 있다.

소바와 카레: 시원한 소바 한 그릇으로 에돗코의 화끈한 성격을 느끼고, 깊고 풍부한 맛의 간다 카레로 미식 여행을 완성해보는 것도 좋다.

5. 만세이바시(万世橋): 철길 위에 핀 붉은 벽돌의 부활 

간다의 경계에 이르면 붉은 벽돌이 길게 늘어선 고풍스러운 구조물을 만나게 된다. 1912년 건립되었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만세이바시역'을 재생해 만든 상업시설 'mAAch(마치) 에큐트'다. 과거 도쿄 철도 교통의 요지였던 이곳은 이제 트렌디한 편집숍과 카페가 들어선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100년 전의 플랫폼 자리에 올라서면 발치 옆으로 주오선(中央線) 전철이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간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육중한 기차의 진동과 붉은 벽돌 사이로 펼쳐지는 간다강의 풍경은 마치 시간의 틈새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과거의 정거장이 현재의 쉼터가 된 이곳에서, 우리는 도쿄가 기억을 보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우아한 방식을 목격하게 된다.

간다는 도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에도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에돗코의 드높은 기상과 장인들의 고집스러운 정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어내는 축제의 열기까지. 이 활기찬 골목을 뒤로하고, 이제 서민적인 정취와 시장의 북적임이 기다리는 도쿄의 동쪽, 우에노(上野)와 아메요코(ア메横) 시장의 일상을 따라가 본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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