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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승가연합 총재 상산 |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민족은 분단과 냉전이라는 20세기의 유산을 아직 청산하지 못한 채, 적어도 21세기 초반까지는 그 짐을 그대로 지고 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평화에의 길은 평화 그 자체
세계적인 정치사회학자 요한 갈퉁 교수는 불교사상의 가장 큰 특징을 평화주의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불교의 평화사상은 목적으로서의 평화뿐만 아니라 “평화에 이르는 길은 평화 그 자체”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평화’라는 목적이 아무리 옳고 고귀하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위해 ‘전쟁과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염원은 ‘통일’에 있다는 점에 대해 남북한이 모두 뜻을 같이 하고 있고, 통일만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궁극적으로 막을 수 있는 ‘적극적인 평화’의 길이라는 것도 의견을 같이 하고 있을 것이다. 73여 년 간 분단 상태에 있던 남북관계는 변화의 급류를 타고 있다.
우리의 통일운동 속에서 한국불교의 역할에 대해 사상·이념적인 측면과 실제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모색해 보고자 한다.
‘적극적인 평화’의 달성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현 단계 우리가 추진해야 하는 것은 ‘소극적인 평화’이다. 소극적인 평화라고 해서 한반도의 평화에 소극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소극적인 평화 상태에서 남북한 사이의 대립이 궁극적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6·25 전쟁 때처럼 서로 무력을 사용해 전쟁을 해야 하는 상태는 아닌 것이다.
분단 73여 년 동안 ‘적극적인 평화=통일’이라는 목표를 내걸면서도 북한은 적화통일 노선을 걸으며 군비증강을 계속하였고, 한국은 한국대로 한때 ‘북진통일’의 구호를 내걸었다가 북한의 체제위기 이후에는 흡수통일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분단 73여 년 동안 남북한이 얼마나 많은 군사적 충돌을 겪었으며 또한 남북한의 군사적 경쟁에 얼마나 많은 민족 에너지를 소모했던가. 이는 ‘평화에 이르는 길’ 자체가 평화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는 불교의 가르침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결코 적극적 평화나 통일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대량살상력을 갖춘 현대의 전쟁은 민족의 공멸을 가져올 수는 있어도 통일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어느 사회에나 보수와 진보는 있게 마련이고, 어느 정도의 의견대립도 있는 법이다. 진보적인 시각이나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원한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입견을 갖고 상대방의 입장이나 정책을 백안시하는 태도를 버리고, 극단적인 사고를 피해야 할 것이다. 보수 또는 진보의 이데올로기적 깃발 아래 실체적 진실보다는 극단적인 자기 주장만 펴는 것은 결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적인 접근이다.
중도(中道)는 곧 정도(正道)를 말하는 것으로, 단순한 대립적인 시각의 중간항이나 절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파적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벗어나 현 단계 남북관계의 성격을 올바로 바라보고, 우리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대승적인 자세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한국불교도 통일운동의 과정 속에서 일대 방향전환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남북한 평화공존시대와 통일시대를 대비하여 남북한 불교의 통합과 그에 따른 제반 문제점을 포함, 통일정책과 평화전략을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상설적인 전문 연구기관과 교육기관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의 급진전이 예상되는 현시점에서 남북한 불교계의 통합이 시작될 경우, 엄청난 시행착오와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많다. 이에 대비하여 북한 불교 및 남북관계, 통일운동 등을 조사·연구하여 정책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전문적인 상설연구소의 설립과 전문적인 활동가를 육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필요하다.
이곳에서는 통일과정 및 통일 이후 한국불교와 북한불교의 교류·협력과 통합에 따르는 여러 가지 법률적, 제도적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무엇보다 북한불교계에 대한 철저한 실태조사와 한국불교계의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둘째, 냉전의식의 극복을 위해 불교대중을 상대로 한 계몽적인 불교통일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불교사상의 공생(共生) 이념과는 달리 일부 불교계의 스님들이나 지도급 인사들은 시대상황에 뒤떨어지는 냉전 유지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스님들뿐만 아니라 불교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불교신자의 많은 부분이 40대 중반 이후의 중노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역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지역 출신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불교계 통일운동의 주요 과제의 하나는 일부 불교대중이 갖고 있는 냉전의식을 부처님의 평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족 공생의식으로 전환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셋째, 한국불교의 종단들도 자기 개혁을 추진하여야 한다. 남북한 간에 교류와 협력이 활발해지고 남북연합의 실현이 가까워질수록 대북 포교·선교를 둘러싸고 종교 간에 치열한 경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종교시장’은 포화상태에 있기 때문에 북한지역은 새로운 포교·선교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 이미 한국의 ‘종교시장’에서 비교우위를 상실한 불교가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통일시대를 맞이해서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동안 한국불교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러한 시도는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조계종단의 구조 속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해 왔다. 전체 한국불교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는 실패했을 때 오히려 엄청난 분열과 퇴보를 가져다 줄 뿐이다.
따라서 무리하게 종단 전체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하기보다는 당면한 시대적, 민족적인 통일과 평화의 과제 해결에 앞장서서 실천하고 이러한 실천을 통해 통일 및 평화운동을 조직화, 제도화해 나가는 것이 장기적인 전략차원에서 중요하다.
넷째, 한국불교계는 대북사업을 활성화하여 냉전체제의 해체와 평화체제의 구축에 일조를 해야 한다. 다만 한국불교의 발전전략과 연계되지 않은 단순한 대북 지원사업은 지양하고 통일의 발전단계와 과정을 고려하면서, 남북 불교계간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서로간의 신뢰를 구축해 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통일운동 및 평화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는 각종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해 나가되 전체 운동과의 연대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며, 이러한 연대활동이 불교계 통일 및 평화운동의 역량강화로 이어지도록 계획을 잘 짜야 할 것이다.
중장기적으로 통일운동을 담아낼 수 있는 조직과 제도의 정비작업을 병행해 나가야 한다. 아울러 한반도 통일운동은 국제적으로 한반도의 주변정세가 평화적인 환경으로 바뀌지 않으면 그 실효성을 보장받을 수 없으므로, 불교계의 통일 및 평화운동은 국제적인 평화단체와의 국제적인 연대를 꾀할 필요가 있다.
가령, 동북아지역을 비핵지대화하고 다자간 안보협력을 통해 대량살상무기(WMD)의 폐기와 군축을 위해 일본의 불교평화운동단체나 중국, 미국의 NGO들과 연계하여 명실상부한 탈냉전 평화체제의 구축에 노력해 나가야 한다.
“학자의 이론은 열 명, 정치가의 선동은 백 명, 종교인의 설법은 천 명의 대중을 포섭할 수 있다.”는 러시아의 격언처럼, 종교의 파급 효과는 어느 것보다도 크다.
그런 점에서 자신들이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개방하려는 북한당국은 한국 종교계의 대북 활동을 인도적인 지원에만 국한시키고 포교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달가워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교류와 협력의 단계에서 취할 수 있는 남북한 불교의 관계는 ‘일방적인 지원’과 ‘대등한 상호협력’의 두 가지 형태가 예상된다. 일방적인 지원 형태란 한국 불교계가 중심이 되어 북한 불교계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한국불교는 남북관계의 개선과 평화공존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여 이것을 한국불교의 자기혁신과 발전의 기회로 만들어 가야 한다. 이 작업의 성패는 오직 한국불교의 능력과 역량에 달린 문제일 뿐이며, 따라서 불자들의 임무가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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