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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부여의 건국 설화를 가장 먼저 기록한 것은 '논형'「길험편」이다. ‘북이 탁리국 임금의 시녀가 임금 부재중에 임신하여, 임금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크기가 계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제가 임신했습니다.”라고 했다. 아이를 낳아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버려 죽이려 했으나 오히려 동물들이 보호하자,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동명(東明)이라고 이름 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다. 임금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져 죽이려고 하자 동명이 달아나다가, 남쪽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고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서 추격하던 병사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에 도읍하고 동명왕이 되었다.’ 이것은 고조선의 소국 중 하나인 탁리국의 왕자나 왕손 혹은 신흥세력 중 하나인 동명의 세력이 불어나자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있었고, 동명은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추종자들과 함께 엄호수를 건너 도망해서 부여라는 나라를 건국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동・북부여는 ‘흘승골성(訖升骨城)을 수도로 삼고 있던 부여 동명왕의 아들 해부루(解扶婁)가, 천제가 나타나 나라를 옮기라는 꿈을 꿨다는 신하 아란불(阿蘭弗)의 충언을 듣고 지금의 혼춘(琿春)인 가섭원(迦葉原)으로 나라를 옮기고 동부여라 칭했다. 그리고 동부여가 떠난 흘승골성에는 해모수(解慕漱)라는 자가 천제임을 자처하고 나타나서 북부여를 건국하였는데 그 해는 임술년’이라고 한다. 이것은 해모수와 해부루의 세력 다툼에서 해부루가 밀려서 나라가 패망할 위험에 처하자, 신하 아란불이 흘승골성을 양보하고 추종자들과 가섭원으로 옮길 것을 충언하여 그 말을 따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는 ‘북부여 해모수와 사통하여 임신한 유화를 부모가 동부여로 귀양을 보내는 바람에, 해부루가 죽고 뒤를 이어 즉위한 금와를 만난다. 여기에서는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천도한 후 10개월도 안 되어 사망하고 금와가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본 것이다. 왜냐하면 해부루는 해모수에게 밀려 가섭원으로 천도를 했고, 해모수가 북부여 왕으로 즉위한 후 유화부인과 사통했다면 부모가 귀양살이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해모수가 유화부인과 사통한 직후 북부여 왕이 되고, 유화부인이 아이를 낳기 직전에 금와가 왕이 되어 만났다고 해도, 북부여가 건국되고 동부여가 가섭원으로 천도한 지 10개월이 되기 전에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왕이 된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금와를 만난 유화부인은 금와의 배려로 알을 낳고 그 안에서 활 잘 쏘는 주몽이 탄생했다.
주몽이 성장하면서 점점 더 총명하고 용감해지자, 금와의 큰아들 대소가 주몽이 두려워져 죽이려고 하자 도망치다가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엄사수(淹㴲水)를 건너 추격하던 병사들을 따돌리고 졸본에 도읍하여 고구려를 건국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졸본은 곧 흘승골성으로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 일대이므로, 해모수의 아들인 주몽이 해모수가 창건한 북부여의 수도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동명왕의 부여가 있던 곳에서 해부루가 동부여로 이전하고 해모수가 그 자리에 북부여를 건국했으므로, 부여 동명왕이 건넌 엄호수와 고구려 주몽이 건넌 엄사수는 같은 강이며 동부여가 있던 훈춘에서 북진으로 가다가 북진에 거의 도달해서 엄사수를 만난 것이라면, 그 강은 요하나 혹은 그 지류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제시한 건국 설화를 기준으로, 통설대로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한사군을 한반도에 설치하고, 기존 건국 연도에 동・북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이 가능했을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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