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경기 수원 20대 여성 살인사건 부실대응과 ‘룸살롱 황제’로 불린 강남 유흥업소 업주 이경백(40·수감 중)씨와의 유착비리 등 악재가 계속되면서 치안 공백을 우려한 주민들의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경찰 수뇌부들까지 잇따라 비위 의혹을 받으면서 주민밀착형 치안을 담보할 수 있는 자치경찰제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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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환 경기 화성시 자치행정국장이 12일 시청 브리핑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수원토막 살인과 같은 강력사건과 재난상황을 예방하기 위해 CCTV 통합관제센터를 구축해 오는 7월부터 운영한다”고 말하고 있다. 수원 20대 여성 살인사건은 1일 오후 10시40분께 경기도 수원 지동에서 귀가하던 20대 여성을 중국인 오원춘(42)이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가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경찰은 초동수사 늑장대응 등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았으며 이 사건으로 경찰청장과 경기지방경찰청장, 수원 중부경찰서장, 형사과장 등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찰 수뇌부들이 잇따라 비위 의혹에 연루됐다. 현직 지방경찰청장 A씨는 경찰청 특수수사과의 내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A청장은 사건 무마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경찰은 1월 검찰로부터 관련 수사자료를 넘겨받아 내사를 벌이고 있으며 아직 수사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서울경찰청 소속의 한 총경급 간부는 대구 및 경북경찰청 재직시 히로뽕 투약사실을 묵인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1억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지검 강력부(부장검사 조호경)는 17일 B(48) 총경에 대해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대학생 이승훈(26)씨는 “수원 납치살해사건으로 경찰에 대한 실망이 큰 상황에서 이제는 고위 간부들까지 비리에 의혹에 휩싸였다는 소식까지 듣게 됐다”며 “경찰이 언제까지 나쁜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줄지 궁금하기까지 하다”고 씁쓸해 했다.
직장인 노수미(32·여)씨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경찰의 기강 해이가 도를 넘어서는 느낌”이라며 “수사권 독립을 말하기에 앞서 조직내부 단속부터 철저히 하라”고 비판했다.
경찰도 연일 터지는 악재를 우려하면서 자구노력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경찰 관계자는 “연일 경찰 조직에 악재가 이어지는 것 같다”며 “경찰 스스로가 자정 노력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고 강조했다.지난달 8일 제주 서귀포시 성산일출봉에서 제주도 자치경찰단 기마대가 창설식을 가지고 있다. 9명의 기마대원들은 주요 관광지와 올레길 순찰업무 등을 담당한다. -
자치경찰제 더이상 미뤄선 안된다
‘지역 맞춤형 치안’ 위한 유일한 해답
현 치안시스템으론 골목골목 상황파악 능동적 대처 한계 ‘범죄예방 구멍’
‘지역 보안관이 동네를 돌면서 주민 집에 들러 안부를 묻는다. 아파서 울던 어린이는 경찰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겨진다’ 미국 영화의 한 장면이다. 미국에도 성범죄나 유괴가 있지만 이런 상황이면 범죄가 쉽지 않다. 자치경찰이 지역밀착형 치안을 담당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
자치경찰제 높은 필요성에도 제자리걸음 여전
최근 늘어나는 강력범죄를 두고 자치경찰제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 유괴와 성폭행 사건을 예방할 수 있는 자치경찰제 도입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도입필요성과 방법 등에 따른 관련 집단의 이해관계와 주요 법안에 대한 쟁점이 쉽게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치경찰제는 경찰업무를 국가경찰(수사 업무)과 자치경찰(생활 치안)로 분리하는 방안이다. 정부에서 관리하는 국가경찰은 수사·정보·보안 등 국가안보 및 수사 관련 사안을 맡는다.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하는 자치경찰은 각 자치단체 내 생활안전과 치안·교통·경비 업무를 주로 맡게 된다.
자치경찰은 지역주민의 치안수요 성향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운영, 지역형 범죄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단체장이 인사권과 치안정책 입안권을 가져 주민 맞춤형 방범 활동이 가능하게 된다.
지역 치안에 있어서 주민들의 참여와 통제의 확대, 자치단체의 행정 집행력 보강,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역할분담에 의한 전문성 확보와 치안력 강화가 가능해진다.
정길우 제주자치경찰단 정책과장은 “국가경찰은 어느 한 분야도 전문화되지 않고 있다”며 “제주도는 축제나 행사가 많은데 자치경찰은 매년 같은 업무를 반복해 효율적인 수행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지방자치 정착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자치경찰제는 지방자치단체가 자기의 권한과 책임으로 치안행정을 수행함으로써 온전한 지방자치를 실현하는 제도다. 자치경찰사무는 자치단체 고유사무의 기본을 이루고 있어 지방자치제가 정착된 선진국에서는 예외 없이 자치경찰제를 도입·실시하고 있다.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함께 안전에 대한 욕구도 급격히 커지고 있으나 현행 국가경찰체제만으로는 생활주변의 세세한 곳까지 두루 살피고 보호하는 데 구조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자치경찰제가 도입되면 치안행정 수행에 자치단체의 자율성과 주민의 참여도를 획기적으로 높여 지역특성과 여건에 적합한 맞춤형 치안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상호 협력과 선의의 경쟁으로 국가전체의 치안역량이 강화될 전망이다.
최근 문제가 된 강력범죄 예방 효과도 크다. 양영철 제주대 교수는 “현재 지구대에 경찰 병력의 50% 정도가 배치돼있다”며 “자치경찰제를 시행하면 국가경찰은 살인, 유괴 등 강력범죄예방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치안도 부익부 빈익빈?… 해결과제 산적
자치경찰제는 지방자치 정착에 꼭 필요한 제도지만 시행까지 상당한 과제가 쌓여 있다.
먼저 정당에 소속한 지자체장이 단속권한이 있는 자치경찰대를 운영하는 게 제도의 핵심인 만큼 정치적인 중립을 지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선출직인 기초자치단체장들이 주민 여론과 표를 의식, 치안행정을 선심성 분야에 치중하거나 정치적 경쟁자를 견제하는데 개인 용도로 활용할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한 견제장치가 요구된다. 자치경찰이 지방토호세력과 유착해 비리구조가 고착화될 가능성도 있다.
치안의 ‘부익부 빈익빈’도 우려된다. 자치단체별 재정 형편의 편차가 큰 현실에서 소요비용을 지자체가 대야하는 자치경찰제가 시행되면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경찰의 치안서비스조차 ‘빈부’의 격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일례로 최근 살인사건이 발생한 수원시의 1㎢당 CCTV 분포 대수는 6대에 불과했다. 반면 서울 강남구는 1㎢마다 32대, 서초구 27대, 용산구 60대가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업무가 중복 충돌할 가능성이 큰 것도 우려된다. 양자간 갈등조정 및 협력을 위해 의사소통 채널을 마련하고 있지만 신속한 결정이 어려울 수 있다. 관할권 확보다툼은 물론 서로 상대방에 떠넘기다 치안공백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명확한 선을 긋기가 모호한 사건이나 업무에 대해 합리적인 해결 방안이 필요하다.
시행과정에서도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제주자치경찰은 정원을 127명으로 책정했지만 정부의 예산지원이 출범당시 국가경찰 이체분(38명)으로 제한돼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의 분석 결과 정부의 자치경찰 예산지원액은 2006년 22억5200만원에서 2011년 26억2100만원으로 3억여 원 증가한 반면 제주도 부담 지방비는 2006년 4억6200만원에서 2011년 35억7800만원으로 30억원 늘어나는 등 매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정 정책과장은 “정부지원 예산이 전체 인건비의 절반도 못 미친다”며 “지방과 정부가 각각 6:4인 운영예산을 3:7수준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일부 업무는 자치경찰과 국가경찰의 공통사무라서 책임과 권한 등이 불분명해 일원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자치경찰제가 연착륙하려면 지역 특성화와 시범운영 확대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안영훈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제주에서 하고 있는 자치경찰제는 항만, 공항 등 일정 지역에만 배치돼 주민 생활과 연계된 치안이나 학교폭력 등에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며 “제주는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있는 만큼 광역시나 농촌 등에 다른 방식으로 시범 사업을 진행해 미비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치경찰은 도농복합형, 도심 밀집지역 등 지역 특성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형재 기자 news34567@segye.com
- 기사입력 2012.04.20 (금)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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