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에 남은 남침의 흔적… 평화통일연합 회원들, 철원 제2땅굴 견학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9-11 07:05:56

9월 10일 철원 방문… 정전 이후에도 이어진 군사적 위협의 역사 돌아봐 평화통일연합 회원들이 땅굴을 견학 전에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 = 이승민 기자.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일본 평화통일연합 회원들이 지난 9월 10일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에 있는 제2땅굴을 견학했다. 전날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6·25전쟁의 역사를 살펴본 데 이어, 이날은 북한이 남침을 위해 굴착한 지하 통로를 찾아 정전 이후에도 이어진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현실을 돌아봤다.

제2땅굴은 지상에서는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위협이 땅속에서 어떻게 준비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단단한 암반을 뚫고 남쪽으로 이어진 통로에는 병력을 은밀하게 침투시키려 했던 북한의 군사적 의도가 남아 있다. 전쟁의 총성이 멎은 뒤에도 남침의 위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1975년 3월 철원에서 발견된 제2땅굴은 총길이 약 3.5㎞로, 지하 약 50~160m의 화강암층을 뚫고 만들어졌다.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약 1.1㎞까지 이어졌으며,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공간도 갖추고 있었다. 지상의 철책과 감시망을 피해 대규모 병력을 기습 침투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발견 당시 큰 충격을 안겼다.

땅굴의 발견은 작은 이상 징후를 놓치지 않은 장병들의 주의와 끈질긴 탐지 노력의 결과였다. 육군 제6보병사단 장병들이 지면의 미세한 진동과 지하에서 들려오는 폭음을 감지한 뒤 탐지 활동을 이어갔고, 시추와 굴착을 거쳐 땅굴의 실체를 확인했다.

그러나 발견 이후에도 위험은 계속됐다. 내부를 수색하고 확보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이 설치한 지뢰와 부비트랩으로 우리 장병 8명이 목숨을 잃었다. 땅굴 입구의 위령비는 보이지 않는 위협을 막아내다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곳을 견학할 수 있게 된 배경에도 장병들의 헌신이 자리하고 있다.

제2땅굴의 역사적 의미는 다른 남침용 땅굴의 발견 과정과 함께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남침용 땅굴은 연천과 철원, 파주, 양구에서 차례로 발견됐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확인된 지하 통로들은 북한의 침투 준비가 한 곳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첫 번째로 실체가 드러난 것은 경기도 연천의 제1땅굴이다. 1974년 11월 15일 고랑포 일대 비무장지대에서 우리 군 수색대가 지표면으로 올라오는 수증기를 발견하고 굴토 작업을 진행하면서 확인했다. 폭 약 90㎝, 높이 약 1.2m의 좁은 통로였지만, 북한이 군사분계선 아래로 남침용 통로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 드러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발견 이후 한미 공동조사 과정에서는 북한군이 매설한 폭발물로 한국군과 미군 장교가 희생되기도 했다.

경기도 파주의 제3땅굴은 1978년 10월 17일 발견됐다. 북한에서 온 김부성의 제보를 바탕으로 탐사가 시작됐으며, 시추공에서 폭발음과 함께 물이 솟아오른 현상이 중요한 단서가 됐다. 총길이 약 1,635m, 폭과 높이는 각각 약 2m로, 파주시 안내에 따르면 서울에서 약 52㎞ 떨어져 있다. 수도권과 가까운 곳까지 지하 침투로가 이어졌다는 사실은 당시 안보 불안을 더욱 키웠다.

강원도 양구의 제4땅굴은 1990년 3월 3일 발견됐다. 제3땅굴 이후 약 12년 만에 동부전선에서 또다시 남침용 땅굴이 확인된 것이다. 우리 군은 시추와 분석을 거쳐 별도의 접근 갱도를 굴착해 북한 땅굴에 도달했다. 국방부는 당시 북한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땅굴을 판 행위를 정전협정의 중대한 위반으로 지적했다. 제4땅굴의 발견은 서부와 중부전선에 이어 동부전선에서도 지하 침투가 준비됐음을 보여줬다.

이처럼 네 곳의 땅굴은 모두 정전 이후 발견된 군사시설이다. 전쟁이 멈춘 뒤에도 지하에서는 침투를 위한 굴착이 진행됐고, 이를 찾아내고 차단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희생이 뒤따랐다. 땅굴은 분단의 역사를 설명하는 유적이면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 감당해야 했던 경계와 헌신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번 제2땅굴 견학은 같은 날 찾은 백마고지 전적지와도 역사적 의미가 맞닿아 있다. 백마고지가 6·25전쟁 당시 고지를 지키기 위해 치렀던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라면, 제2땅굴은 정전 이후에도 계속됐던 침투 위협의 흔적이다. 두 장소는 전쟁 중의 희생과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이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역사를 정확히 살펴보는 일은 필요한 과정이다. 남침을 준비했던 구체적인 흔적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치른 희생을 이해해야 오늘의 안전이 어떤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도 알 수 있다.

평화통일연합 회원들의 이번 방문은 전쟁기념관에서 접한 기록을 분단 현장의 실제 공간과 연결하는 시간이었다. 철원의 땅속에 남은 통로와 장병들을 기리는 위령비는 희생으로 지켜온 일상을 보전하고, 다음 세대에 전쟁의 두려움 없는 한반도를 물려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地下に残る南侵の痕跡…平和統一聯合の会員ら、鉄原の第2トンネルを見学

9月10日に鉄原を訪問…休戦後も続いた軍事的脅威の歴史をたどる

[LOCAL世界 = 李勝敏特派員] 日本の平和統一聯合の会員らが9月10日、江原特別自治道鉄原郡にある第2トンネルを見学した。前日にソウル・龍山の戦争記念館で朝鮮戦争の歴史を学んだのに続き、この日は北朝鮮が南侵のために掘削した地下通路を訪れ、休戦後も続く朝鮮半島の軍事的対峙の現実に目を向けた。

第2トンネルは、地上からは容易にうかがい知ることのできない脅威が、地下でどのように準備されていたのかを示す現場である。硬い岩盤を貫いて南へと延びる通路には、兵力をひそかに浸透させようとした北朝鮮の軍事的意図が刻まれている。戦争の銃声がやんでも、南侵の危険まで消え去ったわけではなかったことを物語る痕跡だ。

1975年3月に鉄原で発見された第2トンネルは、全長約3.5キロメートル。地下約50~160メートルの花崗岩層を掘り抜いて造られていた。軍事境界線から南側へ約1.1キロメートルにわたって延び、兵力を集結させる空間も備えていた。地上の鉄条網や監視網をかいくぐり、大規模な兵力を奇襲的に浸透させようとした施設であったことから、発見当時、大きな衝撃を与えた。

トンネルの発見は、わずかな異常の兆候も見逃さなかった将兵の注意力と、粘り強い探知活動の成果だった。韓国陸軍第6歩兵師団の将兵が地面のかすかな振動や地下から聞こえる爆発音を察知したことをきっかけに調査が続けられ、試錐と掘削を経て、その実体が確認された。

しかし、発見後も危険は続いた。内部を捜索し、安全を確保する過程で、北朝鮮軍が仕掛けた地雷やブービートラップにより、韓国軍の将兵8人が命を落とした。入り口に立つ慰霊碑は、見えない脅威を食い止めようとして犠牲になった将兵を悼むものである。今日、人々がこの場所を見学できる背景にも、彼らの献身がある。

第2トンネルの歴史的意味は、ほかの南侵用トンネルの発見経緯と併せて見ることで、より明確になる。南侵用トンネルは、漣川、鉄原、坡州、楊口で相次いで発見された。異なる地域で確認された地下通路は、北朝鮮による浸透の準備が、一カ所にとどまらなかったことを示している。

最初に実体が明らかになったのは、京畿道漣川の第1トンネルである。1974年11月15日、高浪浦一帯の非武装地帯で、韓国軍の捜索隊が地表から上がる水蒸気を発見し、掘削を進めたことで確認された。幅約90センチメートル、高さ約1.2メートルの狭い通路だったが、北朝鮮が軍事境界線の地下に南侵用通路を造っていた事実が初めて明らかになったという点で、大きな意味を持つ。発見後の韓米合同調査では、北朝鮮軍が埋設した爆発物により、韓国軍と米軍の将校が犠牲となった。

京畿道坡州の第3トンネルは、1978年10月17日に発見された。北朝鮮から来た金富成氏の情報提供をもとに探査が始まり、試錐孔から爆発音とともに水が噴き出したことが重要な手掛かりとなった。全長約1,635メートル、幅と高さはそれぞれ約2メートルで、坡州市の案内によると、ソウルから約52キロメートルの地点に位置する。首都圏に近い場所まで地下の侵入路が延びていた事実は、当時の安全保障への不安をさらに強めた。

江原道楊口の第4トンネルは、1990年3月3日に発見された。第3トンネルの発見から約12年後、東部戦線で再び南侵用トンネルが確認されたのである。韓国軍は試錐と分析を重ね、別の接続坑道を掘削して北朝鮮側のトンネルに到達した。韓国国防部は当時、北朝鮮が軍事境界線を越えて南側にトンネルを掘った行為を、休戦協定への重大な違反と指摘した。第4トンネルの発見は、西部・中部戦線に続き、東部戦線でも地下からの浸透が準備されていたことを示した。

このように、四つのトンネルはいずれも休戦後に発見された軍事施設である。戦争が止まった後も、地下では浸透に向けた掘削が進められ、それを発見し、阻止する過程で新たな犠牲が生まれた。トンネルは分断の歴史を伝える遺構であると同時に、平和を守るために続けられてきた警戒と献身の記録でもある。

今回の第2トンネル見学は、同じ日に訪れた白馬高地戦跡とも歴史的な意味でつながっている。白馬高地が朝鮮戦争当時、高地を守るために激戦が繰り広げられた場所であるならば、第2トンネルは休戦後も続いた浸透の脅威の痕跡である。二つの場所は、戦争中の犠牲と、戦争を防ぐための努力が連続していることを示している。

平和と統一を語るうえで、こうした歴史を正確に見つめることは欠かせない。南侵を準備した具体的な痕跡と、それを阻止するために払われた犠牲を理解してこそ、今日の安全がどのような土台の上に成り立っているのかを知ることができる。

平和統一聯合の会員らによる今回の訪問は、戦争記念館で学んだ記録を、分断の現場に残る実際の空間と結び付ける機会となった。鉄原の地下に残された通路と将兵を追悼する慰霊碑は、犠牲によって守られてきた日常を保ち、次の世代に戦争の恐怖のない朝鮮半島を引き継ぐために何をすべきかを、私たちに問いかけ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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