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지게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8-15 08:43:16
물지게
이승민
어린 시절
물 한 동이가
참으로 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랫마을 우물가에 가면
맑은 물 위로
하늘이 먼저 떠 있었고,
두레박을 깊이 내려
한 바가지 물을 길어 올리면
우물 속에서
어린 내 얼굴도 함께 올라왔습니다
어머니는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흔들리는 물동이를 달래며
말없이 걸으시던 어머니
나도 어느 날부터
양쪽에 물동이를 매단
물지게를 등에 지고
집을 향해 밭길을 걸었습니다
작은 어깨를 누르던 무게,
찰랑찰랑 흔들리던 물소리,
흙길 위에 길게 드리운
내 어린 그림자.
힘이 들 때면
잠시 물지게를 내려놓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푸른 하늘은 말이 없었고
바람은 보리밭을 스쳐 갔으며
멀리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우리 아들, 고생했다”
한마디 건네주시고
정성스레 물을 받아
항아리에 부으셨습니다
그 물은
가족의 목을 적시고
밥을 짓고
하루의 피로를 씻어 주던
우리 집의 생명수였습니다
이제는
어디서든 물이 나오고
수도꼭지만 틀면
맑은 물이 쏟아지지만,
나는 가끔
그 시절의 물이 그립습니다
물지게를 지고 걷던
흙길이 그립고,
우물가에서 웃음꽃 피우던
동네 사람들의 얼굴이 그립고,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도
한없이 평온해 보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
그 길도, 우물도,
어머니도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았지만,
오늘도 내 마음 한편에는
작은 물지게 하나가 있습니다
그 물지게를 지고
나는 다시
어린 시절의 밭길을 걷습니다
찰랑찰랑 물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의 뒤를 따라
아득한 고향집으로
천천히, 천천히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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