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우 칼럼] 소현세자와 사도세자의 죽음-병오년에 보는 오늘(Ⅴ)

마나미 기자

| 2026-02-02 14:07:04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소현세자가 죽는 바람에 세손 석철이 뒤를 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인조가 독단적으로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바람에 형의 세 아들을 뒤로하고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이지만, 성격이나 정치의 모든 것은 과감하고 파격적인 분이셨다. 대대로 나라에 공이 있는 임금의 친척인 훈척((勳戚)만을 임명하던 훈련대장에 이완 대장을 임명할 정도로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며 북벌을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백성들의 삶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한 왕이다.

사도세자는 무예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 소탈하고 검소한 성격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그의 현조부인 효종과 매우 닮았다고 한다. 어릴 적에 비단과 무명을 놓고 어느 것으로 옷을 지어주면 좋겠냐고 물으면 어린 마음에 당연히 화려한 비단을 짚었을 것 같지만, 비단은 사치이니 무명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좋겠다고 했을 정도로 소탈하고 검소한 성격이었다.

또한 아버지 영조와는 성격도 사뭇 달랐을 뿐만 아니라 정치하는 방법 역시 많이 달랐다. 아버지 영조가 입으로는 탕평책을 쓰면서도 실제로는 노론의 편에 서서 정치를 하는 것과는 다르게 정말 탕평책을 펼치기 위해서 파당의 하수인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인재를 등용하는 길을 가고자 했다. 당시 노론과 각을 세우던 소론을 가까이 한 것은 물론 심지어는 남인과도 정사를 논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그분 역시 평안도를 시찰하시면서 청룡언월도를 소지하고 남인과 승려들을 동행한 것이, 당시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는 권력을 조금이라도 빼앗기게 될까 봐 안달하던 노론의 눈 밖에 나서 모함을 당한다. 

청룡언월도를 지니고 간 것은 평안도 세력을 모아 반정하겠다는 의미이며, 승려들을 대동한 것이 여승들을 데리고 쾌락을 즐긴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자신들의 적인 남인들을 동반하고 유교만을 숭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서인들에게 승려들을 대동한 것은 물리쳐야 할 적으로 치부된 것이다. 그렇다고 영조가 사도세자의 진심을 비롯한 전후 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영조의 힘으로는 서인들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기에,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죽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사도세자의 묘지석에 적혀 있는 묘지문이다. 묘지문을 아버지 영조가 직접 썼다는 것을 밝히면서 생각할‘사(思)’, 슬퍼할‘도(悼)’를 쓴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특사(特賜)한 것은 물론, 애절하고 안타까운 아버지의 심정이 구구절절 흐르는 글로 묘지석을 남긴 것을 보면 영조가 아들을 죽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정사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심했다고도 한다. 영조가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을 진정시킬 일환으로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대리청정하는 동안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해서 병적인 증세를 보인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정말 정신병 때문에 아버지 영조로부터 뒤주에 갇혀 죽는 조선 왕실 최악의 비극 중 하나를 연출했는지는 다시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다. 

안타깝다면 안타깝고 희한하다면 희한한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조선 왕실 최악의 비극적인 사건의 희생자인 세자 두 분 모두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시강원에 의하면, 학문과 무공 모두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신 분들이다. 일각에서는 소현세자는 천재였으나 사도세자는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영조와 마주 앉아 중국 한 나라 제왕들의 치적과 관리 등용에 관해 평하며 업적의 공과를 논했다는 기록이나, 뒤주에 들어가기 바로 며칠 전인 1762년 5월 9일에 직접 서문을 작성한 책으로, <열국지>, 우리가 흔히 <삼국지>라고 하는 <삼국지연의>, <서유기>, <수호지> 같이 지금도 고전으로 꼽히는 소설은 물론 <성경직해>나 <칠극> 같은 가톨릭 관련 서적들까지 김덕성에게 삽화로 그리게 하여 『중국소설회모본(中國小說繪模本)』을 편찬한 완산 이씨(完山 李氏)가 사도세자로 밝혀진 점 등을 볼 때 그 학문적 깊이 역시 대단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무 최고조에 달해서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백성들을 위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청나라와 명나라 전장을 누빈 기개와, 보릿고개를 겪으며 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조금이라도 더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평안도 곡창지대 시찰에 나서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갈구하던 두 분은, 간신배들이 그 숭고한 뜻 자체를 모함의 구실로 이용하는 바람에 뜻을 펼치기도 전에 꿈만 삼킨 채 돌아가시고 말았다. (다음 호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 로컬(LOCAL)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