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오지의 뿌리, 수호신을 모신 하치오지 성터
실크로드를 일군 고대 유민들의 땀방울
신령한 기운이 깃든 세계인의 명산, 다카오산
신령한 기운이 깃든 세계인의 명산, 다카오산
[로컬세계 = 글 사진 이승민 도쿄 특파원] 이번 산책의 발길은 다마(多摩) 지역의 서쪽 관문이자, 다마의 지자체 중 가장 많은 인구를 품은 하치오지(八王子)로 향한다. 하치오지는 1917년 도쿄부(현재의 도쿄도)에서 도쿄시(현재의 23구)에 이어 두 번째로 시제(市制)를 시행했을 만큼 역사가 깊은 곳이며, 오늘날에는 도쿄도 최초의 '중핵시(中核市)'이자 서부 최대의 거점 도시다. 미쉐린 가이드가 인정한 수려한 자연의 다카오산(高尾山)과 유구한 역사적 자산이 도심의 활기와 어우러진 하치오지의 독특한 매력을 따라 걸어본다.
1. 황금빛 실크로드를 품었던 ‘뽕나무의 도읍’
하치오지는 옛 무사시국(武蔵国)의 전통을 잇는 오랜 역사의 도시다. 에도(江戸) 시대에는 에도와 가이국(甲斐国, 현 야마나시현)을 잇는 고슈 가도(甲州街道)의 주요 숙박소인 '하치오지 숙구(八王子宿)'가 위치하여 인적, 물적 교류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이곳은 주변 지역의 성한 견직물 산업과 양잠업을 바탕으로 일찍이 '뽕나무의 도읍(桑の都, 소토)'이라는 아름다운 별칭을 얻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동일본 전역에서 모여든 생사(生絲)와 견직물의 집산지가 되었고, 이는 현재의 JR 요코하마선(横浜線)의 전신인 요코하마 철도를 통해 요코하마항으로 운송되어 세계로 수출되며 일본의 근대화를 이끄는 핵심 외화 획득원이 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의류 산업의 중심지는 이동했지만, 지금도 역 북쪽 출구의 나카초(中町) 거리에는 다마 지역에서 유일한 화류계(花街)인 '구로베이 거리(黒塀通り)'가 남아 옛 영광을 묵묵히 전하고 있다.
2. 하치오지의 뿌리, 수호신을 모신 하치오지 성터
하치오지라는 독특한 지명의 유래는 불교의 수호신인 '하치오지 권현(八王子権現)'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후반, 전국 시대의 유력 다이묘였던 후호조(後北条) 가문의 호조 우지테루(北条氏照)가 깊은 산세의 구릉 지대에 '하치오지 성(八王子城)'을 쌓으면서 이 이름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관동 공략 당시 격렬한 전투 끝에 함락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현재는 일본 100대 명성(名城) 중 하나로 지정되어 성벽과 성문 등이 정교하게 복원되었다. 고즈넉한 성터를 산책하다 보면 신비로운 숲의 기운과 함께 성을 지키려 했던 옛 무사들의 비장한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3. 실크로드를 일군 고대 유민들의 땀방울
하치오지가 자랑하는 풍요로운 역사와 문화의 기저에는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의 묵직한 발자취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와 백제 등 삼국 시대의 유민들은 다마강 유역과 이웃한 고려군(高麗郡) 일대로 대거 이주하여 척박한 분지를 비옥한 전토로 개간했다.
특히 이들이 전파한 선진 양잠 및 견직 기술은 하치오지가 훗날 '직물의 도시'이자 '뽕나무의 도읍'으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자양분이 되었다. 수려한 다카오산의 자락마다 깃든 고대 문화의 숨결은 1,300년 전 새로운 문명을 꽃피우고자 이 땅을 땀으로 적셨던 우리 선조들의 개척 정신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4. 신령한 기운이 깃든 세계인의 명산, 다카오산
하치오지 산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혼의 안식처는 단연 다카오산(高尾山)이다. 도심에서 전철로 불과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약 1,200종이 넘는 풍부한 식생을 보존하고 있어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최고 등급인 별 3개를 받은 세계적인 명산이다. 연간 300만 명에 달하는 세계 제일의 등산객 수를 자랑하는 이곳은, 2020년 도쿄도 최초로 문화청이 지정하는 '일본유산(日本遺産)'에 인증되기도 했다.
케이블카나 리프트를 타고 편안하게 오를 수 있는 코스부터 울창한 삼나무 숲길을 걷는 하이킹 코스까지 다채롭게 마련되어 있어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744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 '야쿠오인(薬王院)'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산악 신앙의 수행자들인 '텐구(天狗)'의 전설이 깃든 곳으로, 사찰 곳곳에 세워진 거대한 텐구 석상들이 산책자들에게 기묘하고도 신령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5. 청춘의 활기가 숨 쉬는 대학도시와 가로수길
산에서 내려와 하치오지 도심으로 돌아오면 에도 시대의 활기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넓은 가로수길이 펼쳐진다. 하치오지는 1960년대 후반부터 도심의 여러 대학 캠퍼스가 이전해 오면서 현재는 23개의 대학 및 고등교육기관과 11만 명의 학생이 상주하는 일본 유수의 '대학도시'이기도 하다. 덕분에 오랜 역사 도시의 중후함 속에 청춘의 활기가 묘하게 교차한다.
매년 가을이면 고슈 가도를 따라 약 4km 구간에 심어진 은행나무들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장관을 연출하는 '하치오지 은행나무 축제(八王子いちょう祭り)'가 열려 도시 전체가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역 주변의 세련된 현대식 상업 시설들 사이로 백 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노포 베이커리와 양조장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과거와 현재가 정교하게 직조된 하치오지만의 독특한 생활 문화를 만끽할 수 있다.
하치오지는 전국 시대의 치열했던 역사적 흔적과 다카오산이 선사하는 영험한 대자연, 그리고 고슈 가도를 따라 흐르는 상업 도시의 활기를 영리하게 품어낸 도시다. 번잡한 도쿄 중심부에서 잠시 벗어나, 깊은 산세의 고요함과 오랜 역사의 온기를 따라 걷는 이 길은 도시와 자연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균형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멀리 다카오산 실루엣 너머로 저무는 붉은 노을을 뒤로하고, 도쿄 산책의 발길은 이제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 계속 –
[기자 메모]
다카오산 산책 팁: 산행 후에는 다카오산구치역(高尾山口駅) 바로 옆에 위치한 천연 온천에서 피로를 풀거나, 하치오지의 오랜 명물인 메밀국수 '다카오 토로로 소바(とろろそば)'를 맛보는 코스를 강력히 추천한다.
하치오지 라멘: 하치오지는 독자적인 라멘 문화로도 유명하다. 간장(쇼유) 베이스의 맑은 국물에 잘게 썬 생양파를 고명으로 올리고 라드가 살짝 감도는 '하치오지 라멘(八王子ラーメン)'은 이 지역 산책길에서 반드시 경험해야 할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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