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케라마 제도 상륙부터 9월 7일 항복 문서 서명까지의 비극
[로컬세계 = 이승민 도쿄 특파원]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태평양 전쟁 사상 가장 참혹했던 지상전으로 꼽히는 '오키나와 전투'가 올해로 81주년을 맞이했다.
일본군 사령관의 자결로 조직적 저항이 마감된 날이자 오키나와 현이 지정한 '위령의 날'인 23일, 오키나와 현 이토만시(糸満市)에 위치한 평화기념공원에서는 국적과 신분을 초월해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전몰자 추도식이 엄수됐다. 81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섬 전체를 초토화했던 ‘철의 폭풍’의 기억과 그로 인한 상흔은 여전히 오키나와 땅에 깊게 새겨져 있다.
게라마 제도 상륙으로 시작된 포화…슈리성서 40여 일간 격전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3월 26일 미군이 나하시 서쪽에 위치한 케라마(慶良間) 제도에 상륙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미군은 4월 1일 오키나와 본섬 중부의 요미탄(読谷)촌에 상륙한 뒤, 북부와 남부로 전선을 나누어 진격을 개시했다.
남진한 미군은 일본군 지휘 본부가 있던 슈리성(首里城)을 목표로 삼았고, 중부 및 슈리 지역을 둘러싼 양국의 전투는 40일 이상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결국 5월 하순, 일본군이 남부 지역으로 퇴각하면서 오키나와 전역은 아이와 노인 등 무고한 민간인들이 고스란히 말려드는 참혹한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군인과 주민이 뒤섞인 남부 지역에서 폭격과 소탕전이 이어지며 가장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이곳에서 발생했다.
오키나와 주민 9만 4천 명 사망…조선인 희생자도 함께 잠들어
이 전투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지상전으로 기록되는 이유는 민간인의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전투가 남긴 인명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이 전투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오키나와 현지 주민만 9만 4,000명에 달한다. 오키나와 출신자를 포함한 일본군 사망자는 약 9만 4,136명이었으며, 미군 역시 1만 2,520명이 전사했다. 민간인 희생자 수가 정규 군인 사망자 수와 맞먹는 비극적인 수치다.
이 이국땅의 포화 속에는 일제에 의해 군부나 위안부 등으로 강제 동원된 수천 명의 조선인들의 피와 눈물도 함께 흐르고 있다. 현재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내에 모든 희생자의 이름을 국적 구분 없이 새겨놓은 '평화의 초석(礎)'에는 신원이 확인된 한국인 희생자들의 이름도 나란히 줄지어 있어, 역사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다.
사령관 자결 후에도 이어진 저항…최종 종전은 9월 7일
흔히 일본군 사령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6월 23일을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날로 기억하지만, 비극은 그날로 멈추지 않았다. 사령관 자결 이후에도 섬 곳곳에 고립된 일본 병사들의 산발적인 저항과 전투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한 것은 전쟁이 시작된 지 5개월이 훌쩍 지난 1945년 9월 7일의 일이었다.
원폭 투하의 도화선, 그리고 전후에도 이어지는 기지의 무게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이 입은 심각한 인명 피해는 미 수뇌부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일본 본토 상륙 시 발생할 엄청난 피해를 우려한 미국은 결국 '원자폭탄 투하'라는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이는 일본과의 전쟁을 종식하는 결정적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키나와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1972년까지 27년간 미군정의 직접 지배를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섬 곳곳에 대규모 미군 기지가 들어섰다.
81주년을 맞은 올해 추도식 현장에는 고령의 생존자들과 유족, 그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모여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 등 지구촌 곳곳에서 여전히 포성이 끊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오키나와가 전하는 '철의 폭풍'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무겁게 일깨워주고 있다.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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