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만일 그렇다면 한족이 만주와 한반도의 영토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기에 한반도의 영토문화마저 우리 한민족 고유의 문화임을 주장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 건국 연도가 기원전 108년 이전이고 그에 따른 고구려 영역이 요하 서쪽까지라는 것이 증명된다면,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위만조선 침공 당시 한나라는 한반도는커녕 만주에도 발을 디디지 못하고 한사군은 요하 서쪽에 설치될 수밖에 없었으니, 한반도는 물론 만주의 영토문화는 오로지 우리 한민족의 고유 유산으로 ‘영토문화론’을 기반으로 한 ‘문화영토론’에 의해서 만주의 영토권을 주장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명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삼국의 건국 연도는 고구려 기원전 37년, 신라 기원전 57년, 백제 기원전 18년으로 기록되어 고구려가 신라보다 20년이 늦다. 이에 대해서 신채호를 비롯한 남북의 많은 학자는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이 신라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고구려 초기 역사를 삭감한 것이라고 하면서, 보편적으로 다음의 4가지 이유를 들어서 고구려 건국 연도가 소급되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첫째, 광개토대왕릉비에 광개토대왕이 시조 추모왕의 17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12세손이 되므로 5세손이 삭감되었다.
이것은 건국 초기에 재위했던 왕들에 대한 기록을 누락시켜 역사를 삭감하거나 다른 왕의 업적과 합해서 기록함으로써 역사를 축소해서 건국 연도를 늦췄다는 것이다. 즉 어떤 왕의 재위 연수를 삭감하고 그 왕의 업적을 바로 앞의 왕이나 바로 뒤의 왕 중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거나 업적이 비슷한 왕의 업적에 같이 기록함으로써 그만큼 고구려 역사가 축소되고 건국 연도는 늦춰졌다는 것이다.
둘째, 보장왕 27년에 “당 고종의 임무를 받고 요동에서 귀국한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에게 고종이 군 내부사정을 묻자 가언충이 승리를 다짐하는 발언 중에 ‘고구려비기'에 고구려는 9백년이 되지 못하여 마땅히 80대장이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씨가 나라를 세운지 9백년이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라고 했다”라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이다.
이 말은 전쟁을 위해서 많은 연구를 통해 준비했을 적군의 장수가 고구려가 건국 된지 900년이 되었다는 것을 직접 밝혀 준 것으로, 고구려가 멸망하던 668년에 나온 말이니 기존의 통설대로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다면 건국 후 705년밖에 되지 않아서 고구려 건국 연도가 200여년은 앞당겨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다.
셋째, '삼국사기' 사론에 ‘고구려는 진(기원전 221~기원전 206년)・한(기원전 202년~220년)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나라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부터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나라가 존재하던 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 사이에도 고구려가 함께 존재하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다는 기록은 왜곡된 것이라는 의미다.
넷째, 한 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할 때 ‘현토군에 고구려현(縣)’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전해 오는 여러 역사서의 기록을 분석해 볼 때, 한 무제가 기원전 107년에 현토군에 고구려현을 설치한 것은 이미 고구려라는 나라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판명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은 기원전 107년 이전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오히려 고구려 건국 연도의 소급 필요성을 주장하는 기록이라는 것이 고구려 건국 연도 소급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다음호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저작권자ⓒ 로컬(LOCAL)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