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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일본의 대륙진출에 대한 의지가 가득 담겼던 ‘대고려국’은 만주를 근거로 독립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 국기와 국새까지 준비했으나, 건국하지는 못했던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의 영토권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역사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반드시 그 실체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대고려국’의 건국을 계획한 해가 1917년경이며, 이것은 임시정부 수립의 사전단계라고 볼 수 있는 ‘대동단결선언’ 보다 약간 앞선 것으로 보인다.
‘대동단결선언’은 1917년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 신채호, 안창호, 조소앙 등 14인의 독립혁명가들에 의해 선언된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다. 순종의 주권 포기는 주권이 백성들에게 상속된 것이요, 구한국의 마지막 날은 신한국 최초의 날로서 외국에게 주권을 넘기는 것은 근본적인 무효라고 함으로써, 순종의 주권 포기가 한일병탄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백성들이 주권을 갖는 공화정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강력하게 독립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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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대고려국’ 국기 |
그런데 1921년 3월 29일 다이쇼니치니치신문(大正日日新聞)에 실린 대고려국 헌법 초안에 의하면, ‘대고려국’이 표명한 정치형태가 바로 공화정으로 헌법을 제정하고 의원(議院)을 설치하여 정부를 조직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훗날 1919년 9월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화주의와 삼권분립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둘째; ‘대고려국’을 만주에 설립하고자 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고려국’의 영역”에서 다시 논할 것이지만, ‘대고려국’을 만주에 건국하기로 했다는 것은 ‘대고려국’ 건국에 참여한 대한제국의 백성은 물론 일본과 중국인들에게도 만주가 우리 한민족의 영토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그런 계획이 가능했던 것이다.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데 남의 나라 영토에 자신들의 독립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강대국이 약소국의 영토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혹시라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들 나라의 주권도 잃은 약소국 주제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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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대고려국’ 국새 |
그러나 만주의 일부분인 간도가 1909년 간도협약에 의해 중국으로 영토권이 옮겨가기는 했지만, 1909년 당시 9만8000명으로 추정되는 간도주민의 80% 정도가 대한제국 백성으로 간도는 줄곧 전체인구 가운데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항상 80% 정도 유지되었으며, 간도 거주 대한제국 백성은 한일병탄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
간도 거주 대한제국 백성의 숫자는 1907년 7만3000명, 1908년 9만1000명, 1909년 9만8000명, 1910년 10만9500명, 1911년 12만7500명, 1912년 16만3000명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만주의 주요 요지인 간도의 주민은 대한제국의 백성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고려국’을 만주에 건국한다는 계획의 수립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만주는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의 백성들이 그 선조로부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생활터전으로 삼고 그 문화를 전래해 오고 있던 곳이기 때문에, 만주의 영토문화의 문화주권자는 대한제국의 백성들이므로 만주의 영토권은 문화주권자인 대한제국에 있었던 것이다.
만일 ‘대고려국’이 건국되었다면 명실상부하게 국가의 3요소인 주권, 국민, 영토가 갖춰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고려국’ 건국에 대한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고, 일본은 그로부터 십 몇 년 후인 1932년 만주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아이신교로 푸이(愛新覺羅溥儀; 애신각라부의)를 내세워 ‘대고려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곳과 거의 비슷한 영역에 ‘만주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연합4개국의 그릇된 욕심에 의해 만주가 부당하게 중국으로 귀속되는 동북아시아 전체의 비극을 탄생시킨 것이다.
셋째; ‘대고려국’ 건국계획에 참여한 대한제국의 애국지사들은 ‘대고려국’을 건국하여 그곳을 기반으로 무장 군인을 양성하고 그들이 반도 내로 진입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처음에 이 계획을 세운 것은 ‘신한혁명당’으로, 1915년에 세운 계획이었다. 그리고 ‘대고려국’의 건국을 주도했으며 훗날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을 지내기도 했던 양기탁(梁起鐸)을 비롯한 세력이 만주와 시베리아의 독립 세력을 규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실제로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무관을 양성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이 계획을 계승하였다.
따라서 ‘대고려국’의 건국계획이 한반도의 광복을 추구하는 광복군 기지를 확보하고자 한 것은 물론 만주와 한반도가 같은 민족의 영토로 같은 나라라는 일체감을 보여준 증거이기도 하다. (제5회에서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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