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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전회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국조왕 궁은 안제 원년인 121년에 재사의 반란으로 죽임을 당하고 태조대왕 어수가 즉위해서 25년 동안 재위하던 146년에, 태조대왕을 즉위시킨 반란의 공을 누리기 위해서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과 함께 또 다른 반란을 획책하는 차대왕에게 어쩔 수 없이 양위한 사실은, 차대왕의 즉위와 함께 일어난 논공행상과 반정 후에 일어나는 징벌적인 처사를 보아도 여실히 드러난다.
차대왕이 자신에게 반란을 권하던 미유를 즉위 2년(147년) 2월에 좌보로 삼고, 3월에 태조대왕에게 수성의 반란 음모를 고하며 죽이라고 권했던 우보 고복장을 죽인 것이나, 즉위 3년(148년) 4월에 아직 태조대왕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조대왕의 장남 막근을 죽이고 그의 동생 막덕은 스스로 목을 매게 한 것을 보아도 전형적인 반란의 행태다.
'후한서'에 수성을 동생이 아니라 아들로 기록한 오류가 있지만, 그것은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 전달이 어려웠던 그 당시에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이 되었다’라고 기록한 같은 기사 끝부분에 수성이 죽고 동생인 신대왕 백고가 즉위한 기사 역시 ‘수성이 죽고 아들 백고가 왕이 되었다’라고 잘 못 기록된 것을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건국 연도를 늦추기 위해 누락시킨 왕 중 하나가 바로 태조대왕과 혼합 기록한 국조왕이며 고구려 건국 연도를 늦추기 위한 작업도 국조왕에서 끝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이유 중 커다란 하나는, 아무리 국조왕의 재위를 포함한 기록이라지만, 태조대왕이 7세에 즉위하여 100세까지 94년 동안 재위하고 119세에 사망했다는 납득하기 힘든 기록 때문이다.
왕좌 승계가 혼란하던 건국 초기에는 왕을 누락시키고 그 업적을 앞뒤의 왕과 혼합 기록함으로써 건국 연도를 늦춰 역사를 삭감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으나 왕위 승계가 안정된 태조대왕 이후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조대왕이 차대왕에게 양위한 시점부터는 왕의 재위에 관한 기사를 정상적으로 기록하기 위해서, 김부식은 태조대왕과 혼합된 국조왕과 그 전 왕들의 업적 중에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중요한 것들을 포함해서 정리하는 바람에 태조대왕의 재위가 길어져 수명도 같이 길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손영종이 유리왕과 혼합되었다는 유류왕과 여율왕, 대무신왕과 혼합되었다는 대주류왕, 모본왕과 혼합되었다는 애루왕 등 4명의 왕과 필자가 찾아낸 태조대왕과 혼합된 국조왕까지를 살펴보면, 2대 유리왕부터 6대 태조대왕까지 5명의 왕에 누락시킨 5명의 왕을 혼합해서 기록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손영종 이론의 모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5세손에 얽매여 10명 왕의 재위 연수를 합산하는 것이 아니라, 누락시킨 5명 왕의 재위 연수를 기존 5명 왕의 재위 연수를 통해서 추산하여 합산하는 것이 타당하고 판단된다.
유리왕에서 태조대왕까지 초기 5명 왕의 재위 연수인 165년은 삭감된 초기 5명 왕의 재위 연수와 비슷하다고 가정할 수 있으므로 37+165=202, 즉 기원전 202년에서 가장 가까운 갑신년인 기원전 217년을 고구려 건국 연도로 추정하고 그 당위성을 검토해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진・한의 동북쪽에 있었다는 기록은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와 그 뒤를 이은 한나라의 동북쪽에 존립했다는 의미다. 그 이전에 건국되었다면, 그 이전에는 연・진・한의 동북쪽에 있었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륙을 통일한 진나라가 존립한 기원전 221년에서 기원전 206년 사이의 갑신년인 기원전 217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
또한 고구려 건국 연도를 기원전 217년으로 재정립하면, 보장왕이 당나라에 항복한 668년까지는 886년이고,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던 보장왕이 죽음으로써 고구려 왕조가 완전히 사라진 682년까지는 900년이 되어 유국 900년 설과 고구려 존립 기간이 일치한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 연도는 기원전 217년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고구려 건국 연도가 기원전 217년으로 180년 소급되어 재정립되면, 북・동부여의 건국은 기원전 239년으로 소급되고, 시조 고주몽은 기원전 238년에 태어나고, 부여의 건국은 기원전 294년으로 추정된다. 또한 주몽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기록된 대소, 오이, 마리, 협보, 부분노, 괴유, 송양 등이 등장하는 기사는 180년을 소급해서 해석해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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