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에, ‘건광 원년(A.D.121) 봄에 현토 태수 요광 등이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자 궁이 수성에게 맞서 싸우게 하여, 수성이 험요지에서 요광 등의 대군을 막고는 현토를 공격하여 2,000여 명을 살상하였다’라는 기록이나, ‘건광 원년 가을에 고구려 궁이 마한・예맥(馬韓・濊貊)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토(玄菟)를 포위하였다.’라는 기록 등을 보면, 본 칼럼 제7회에서 인용한 '삼국지' 「위서」의 ‘기원전 75년에 현토군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라는 기록 이후로도 고구려와 현토군은 서로를 적대시하고 공격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가 현토군 전체를 포위했다거나, 현토군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는 사건에서의 고구려가 현토군 안에 있는 고구려현이라면, [그림 4]의 가상도에서 보듯이, 그 사건들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기록들에서 고구려가 현토군을 포위하거나 공격했다는 것은 현토군 안에 있는 고구려현이 아니라, [그림 4]의 가상도에서처럼 현토군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고구려에 의해서 벌어진 사건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현토 태수 요광 등이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것은 현토군에서 볼 때 고구려는 완전히 다른 국가라는 관점에서 국경을 넘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지칭하는 고구려는 중국왕조와 신속 관계를 유지하던 현토군의 고구려현과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서(晉書)' 「지리(상)」「현토군」에 의하면 현토군이 서진(西晉; 265~316)에 속해있던 시대에도, ‘현토군은 3,200호(戶)로 고구려 ·망평 ·고현 등 3현이 존재’하여 고구려현은 현토군에 존속했으나, 고구려는 313년에 낙랑군을 축출하는 등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만일 낙랑군을 축출한 고구려가 현토군 안에 있는 고구려현이라면, 한사군 안에 있는 일개 행정구역인 고구려가 같은 한사군을 축출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므로, 현토군 안에 있는 고구려현과 낙랑군을 축출한 고구려는 완전히 서로 다른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기록들을 볼 때, 현토군의 고구려현에서 시작되어 번창했다는 중국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고구려, 즉 현토군을 포함한 한사군과 한사군의 모국인 한나라와는 전혀 관계없는 독립국인 고구려가 존재한 것으로, 현토군의 고구려현은 현토군 설치 당시에 이미 존재하던 고구려의 이름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이 확실히 증명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현토군 고구려현 경내에서 고구려 정권을 세워 점차 융성해져 번창했으나, 정권 초기부터 한사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나라 왕조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으며 역대 중국왕조와 신속 관계를 유지하다가, 당나라에 의해서 통일되어 그 유민 대다수가 한족에 융입되었다는, 중국이 내세우는 동북공정에서의 주장은 완전히 허구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아울러 ‘고구려현에서 요수가 시작된다’라는 ????한서????와 ????산해경????의 기록과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라는 ????삼국지????의 기록 및 ‘고구려 첫 수도는 북진의 의무려산’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해서 한사군은 한반도에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북진의 의무려산 서쪽으로부터 난하 유역에 걸쳐 존재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결국 고구려 시대의 한족 중국왕조는 고구려 영토의 기반인 만주와는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한족 중국왕조는 아무 연관도 없고 오히려 적대국으로 맞서 싸운 역사라는 것을 증명하여, ‘고구려 역사는 중국 역사’라는 동북공정의 기저를 허물어 버림으로써 동북공정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규명한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이 고구려 역사에 집착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고구려와 같은 민족인 고조선과 대진국 발해 사이에 존재하는 고구려 역사를 소유해야 고조선과 대진국 발해 역사를 함께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족 중국이 대진국 발해 역사를 차지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대진국 발해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어야 동북공정에서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통일되어 유민들은 대부분 한족으로 융입되었다’는 중국의 주장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멸망 후 유민 대부분이 대진국 발해로 승계되어, 대진국 발해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지 못하면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펼친 주장이 허구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고구려 역사를 손에 넣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고조선 역사도 중국 손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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