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世越) ‘이 후’ 대한민국(2)
▲ 추성춘 생활정치 이사장 © 로컬세계
[로컬세계] 세월 ‘이전’, 한국 ‘사회’는 우애와 연대의 공동체가 아니라 이기적인 인간의 단순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던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고, 국가가 가는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거기 까지 나는 애써 알 필요가 없다, 나하고 그것이 무슨 관계냐, 내가 나서지 않아도 정치가, 언론이 ,학자나 전문가가 다 해결해 줄 것이며, 설령 공동체가 폐허가 되든 말든, 나는 잘 살 수 있고 나만은 행복해 질수 있다는, 당치도 않은 인간의 독선과 오만이 득실거린 모래성 사회가 아니었는가.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이런 질문 앞에 할 말을 잊고 그냥 우두커니 서 있게 된다.
그러나 세월 ‘이후’, ‘사회’가 가라앉으면 개인도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우쳤다. 사회란 함께, 그것도 강강술래처럼 손에 손을 잡고 같이 살아가야만 되는 공간 이였다. 우리는, 전체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뻔 히 알 수 있는 일을 언제 부턴가 또다시 잊고 살았다.
더욱이 지금 이 시대, 우리 국가와 사회가 부딪히고 있는 산적한 문제들은, 내가 나서지 않고는, 정치도, 언론도, 학문의 세계도, 전문가나 평론가, 그 누구도 다 해결해 주지 못 한다는 엄중한 사실을, 세월 ‘이후’는 일깨워줬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회문제라고 부르는 세월 ‘사건’은,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 고민하고, 해법을 찾아야 할 ‘나의 문제’로 귀착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서, 문제해결의 방법론을 찾고 구체적 방안을 만들어 가라는 엄중한 하늘의 명령, 이것이 세월 ‘이후’ 우리가 받들어야 할 소명이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상에서는 타인만의 문제는 애초에 없었다. 타인의 문제는 바로 나의 문제였을 뿐인데. 따라서 개체적인 개인주의가 아니라 연대적인 공동체주의가 행복한 삶의 좌표임을 새삼 깨우치게 된 것, 이것이 세월 ‘이후’ 우리의 새 주소다.
물론 실제로는 자신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문제로 보이는 것이 많다. 그래서 깊은 생각도 없다. 일일이 다 신경을 켜고 살 마음의 여유도 없다. 생존경쟁의 도시 생활이란 것이 그렇다.
그러나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제도 어느 순간 상황이 돌변해 자신의 목줄을 죄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황이 바로 지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무관심의 장애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고민해서 바뀔 건 없다는 피동적인 무력감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결론은, 우리가 정치와 관료, 언론에 대해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개입하려 하지도 않고 지켜보지도 않은, 이 지독한 무관심의 연쇄를 딱 자르지 않고서, 내일도 모레도 그들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내 맡기고 방치한다면, 대한민국은 ‘정치인의 나라, 관료의 나라’ ‘언론의 나라’일 뿐 ‘국민의 나라’로 만들어질 수 없다고, 죽비가 한순간 우리를 후려친 것이다.
국가가 국민의 집이라면 집 주인이 집을 너무 오래 비워두면 안 된다. 국민이 집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자! 주장할 건 당당이 하고 개입도하고 책임질 일은 책임도 지자.
국민이 똑똑해지고 똑바로 하자. 국민의 무기는 투표권이다. 선거 때라도 정신 차리면 개선될 수 있다. 정치 개혁 없이, 특권과 정경유착, 정관업의 부패구조를 도려 낼 수 없다.
정치가 특권을 내려놓지 않고 환골탈태 하지 않으면 관료도 언론도 개혁되지 못한다.
정치가 이 사회의 모든 질서와 무질서를 가르는 기본이기 때문에 그렇다.
전국의 조문 행렬이 100만 명을 넘어 섰다.
‘국민 상’(喪)을 치르면서 정치개혁 없이 국민의 안전 없다고 국민은 외친다. 이것이 세월(世越) ‘이후’의 우리나라 모습이다. 정치는 자주 변화를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 자주 그 변화에 홀리고 환호한다. 지난 대선 전 어느 정당은 이름을 통째로 바꾸고 느닷없이 상징 색을 빨강으로 바꾼다.
또 최근 어느 정치 세력은 헤쳐 모여로 다른 이름의 정당을 만든다. 그 순간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러나 그 변화라는 것도 포장지를 바꾼 표면적인 것임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한국 정치는 오랫동안 소나기를 피하듯 상황 회피적이거나 표면적인 해결책 찾기에만 바쁘다. 그렇다고 속아 넘어 가거나 알아먹지 못한 국민의 생각이 짧다고만 탓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보자.
정치세력이 극히 좁은 한 곳에 스포트라이트를 쏘아대면 빛은 한 곳에 집중되고 빛을 빼앗긴 어둠의 영역은 그만큼 넓어진다. 자연히 국민이 주의를 기우려야 할 대상이 어둠속으로 숨어들고, 당장 주의를 쏟아야 할 대상도 급격히 줄어든다.
결국 국민의 전체적인 정보처리 능력은 마비 현상을 일으킨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서 국민은 슬로건 정치에 속고 ‘정맹증’(政盲症) 환자로, 자신도 모르게 전락해 가는 것은 아닐까. 국민은 언론을 통해 정치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미디어는 ‘본질’을 놓치거나 외면한다. 언론기업의 이익지상주의, 상업주의, 시청률 지상주의, 정치적 선동주의의 어둠속에 구조적 본질문제는 어렵지 않게 숨어버린다.
결국 정치와 언론이 배가 맞아 한 통이 되고 국민의 사고도 이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가마우지처럼, 둥둥 떠돌아다니는 정보를 그냥 받아 ‘삼키’는 일을 반복해 왔고 미디어가 퍼 나르는 정보가 ‘약도 되고 독도 된다는’걸 깊이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건성건성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사고와 판단을 지배하고 있는 미디어 정보가, 충분히 본질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는 진실이, 이번 위기적 상황에서 맨 얼굴로 확실하게 드러났다.
풍요 속에 빈곤이라고 할까, 정보는 범람하는데 똑바른 정보는 줄어들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 하듯 사회적 흉기로 변질될 수 있는 함량 미달의 정보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고, 특히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마이너스 정보의 구매력이 하늘을 치솟는 현상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된 데 까지는, 사회적 신뢰 자원의 고갈이 본질이라고 보고, 신용사회를 재건하는 일이 급선무가 되는데, 이를 해결해 나가는 첫 출발점으로, 개개인의 올바른 언론생활을 통해 정보를 해체하고 균형 있게 소화, 흡수하는 정보 선별력을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막연하고 앞뒤도 구별할 수 없는 이른바 ‘공기에 지배 받는’ 부화뇌동의 쏠림 생활을 중단 시켜야 된다.
아무튼, 미디어가 우리의 지식과 사고의 틀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무서운 현실을 인식하고, 특정 미디어의 사회관이나 판단이 나를 일방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미디어가 퍼 날라다 준다고 이것저것 편하게 삼키고만 앉아있으면 안 된다. 처음부터 먹지 않아야 하겠지만 잘 못 먹었다고 판단되면 뱉을 건 빨리 뱉어야 한다.
이것이 세월 ‘이후’ 국민의 위기관리, 정보관리 지침이다.
우리가 지금 또렷하게 목격하고 있듯이, 공동체가 위기에 직면하게 될 때 정보욕구는 폭발한다. 이럴 때 오보나 허보(虛報)의 과잉과 연쇄적인 확대 재생산은 국민이 꼭 알아야 할 상황의 실체적 진실을 가릴 뿐 아니라,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정권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
또 정권과 언론 기업의 이익 앞에 국익과 국민의 핵심이익이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비상시나 재난 등 위기 상황에 부닥치면, 미디어의 보도 내용은 하나의 단순한 정보 자료일 뿐이며 설령 사실이라고 하드라도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복수의 사실가운데 한가지라는 것도 알아채야 한다.
정보 자료를 해체해 하나의 똑바른 정보로 완성하는 일은 바로 내 자신의 몫이고 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주위의 몇 사람이라도 ‘정보 교환과 토론’을 위한 네트워크를 확보해야 한다. 혼자 인터넷 검색에만 매달리면 정보 편식은 물론 오판의 위험성이 높다.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판단하며 의사를 결정하기 까지 각자의 주의 깊고, 자주적인 분석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위기적 상황에서 이를 소홀이 할 때, 사회적 충격은 1차 때 보다 2차가 더 크고 피해 영역도 광범위 해 진다.
사람이 아플 때는 입맛에 당기는 것 보다 입에는 써도 몸에 좋은 것을 우선적으로 먹어야 하듯이, 사태가 수습되는 과정에서는 부정적인 마이너스 정보 보다 긍정적인 플러스 정보에 더 큰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 이것이 외상후 사회적 스트레스를 줄여가는 전략적 사고다. 정보 혼선에 의한 ‘정보 재난’은 사태 수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제 2 충격이 장기화 된다.
우리 모두 집단지성을 발휘해 불안의 시간을 단 한 시간이라도 줄여가야겠지만, 한국 사회가 당분간은 자신감의 상실과 무력감, 죄책감의 기류로 뒤덮이는 어려운 상황이 이어질 것이다.
더욱이 예상대로 사회적 기류와 정치의 흐름이, 부정적 정보를 확대 재생산하고 국민이 이에 편승, 불평과 불만, 그리고 대상이 막연한 증오심의 열풍에 휩쓸리게 되면, 자연히 마이너스 정보에 빨려들게 되고, 불안 심리가 다시 ‘정보에 의한 재난’을 촉발시키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텐데, 국민적 지혜로 이를 차단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외상후스트레스가 어느 시기 까지 장기화될 지 여부는 앞으로 석 달 정도의 상황관리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정치권과 정부 언론, 국민각자가 소통과 정보관리에 특단의 주의를 기우리고 ‘정보 재난’으로부터 공동체 질서를 지켜가야 한다. 정부나 언론, 각종 사회성 조직들은 정보의 정교한 분리 작업과 정보의 우선순위에 대한 선택과 집중, 고품격의 대 국민 소통 기술을 동원해야 한다.
소통의 기본은 상대의 마음에 맞춰 내 마음을 먼저 정비하는 일이다.
“청와대가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 “라면에 계란을 넣어 먹은 것도 아니고”식의 말 폭탄이 되풀이 돼선 안 된다. 위기 상황에서 말 할 때는 같은 말이라도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경고를 명심해야 한다. 특히 권위적인 말버릇과 용어 사용에 주의를 집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꾸려가야 할 국가 사회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사고하고 고민하고 결정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생명마저도 지켜갈 수 없는 상황에 계속 맞닥트리게 될 것이다.
엊그제 한 정당 대표의 뼈저린 반성의 말이 있었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 상황에 정확히 맞는 말이다. 기초부터 새로 만들고 문제의 본질을 찾아 나서야 한다. 말 뿐 이고 행동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정치는 이제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필자는 ‘처음’과 ‘기초’ ‘본질’이 뜻하는 건 바로 ’사람‘이라고 본다.
세월 ‘이후’ 대한민국의 본질 문제, 그것은 바로 기초의 문제, ‘사람’ 문제로 귀착된다.
우리는 정치인과 관료, 언론인, 학문 세계의 전문가, 그들을 세월 ‘이후’의 새 대한민국의 새로운 리더로 변화시켜 가는 끈질긴 힘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기를 학수고대 한다.
사람들이 저지른 죄이기에 해법도 사람에게 있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 100만의 조문행렬을 보면서 대한민국 공동체에, 꽃은 다시 피고 있음을 본다.
희생자 유가족은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는 예쁘게 화장을 했고, 아버지도 말끔하게 이발을 했다. 그래야 ‘돌아올 자식이 기뻐하고 좋아할 것 같아서다.’ 그렇다. ‘희망은 절망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누군가가 오래 전 부터 말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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