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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대한제국의 유림들을 기반으로 공화정을 표방했던 ‘대고려국’이 표방한 영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대정일일신문에서 1921년 3월 27일 ‘대고려국’에 관한 첫 기사를 실을 때 많은 부분 왜곡되거나 정확하지 못한 표현을 썼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고구려 건국설화로 시작했고, 3월 28일자 제2회에는 고구려 영토 수복이 ‘대고려국’의 판도라고 공식적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대고려국’의 영역에 대해서 대정일일신문이 보도한 영역과 그 기본 틀은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 내용적인 면을 살펴보면 상당한 차이가 나는 영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대정일일신문에 스에나가 미사오가 보도한 ‘대고려국’의 영역이다. 대정일일신문 1921년 3월 27일자에 실린 ‘대고려국’에 관한 첫 번째 기사에 ‘대고려국’의 판도는 옛 고구려(高句麗)의 판도를 동남으로 줄이고 서북으로 늘린 것으로 동으로는 장백산으로 한반도와 경계 짓고, 서북쪽으로는 스타노보이, 야프로노보이 및 흥안령(興安領)으로 시베리아 및 몽골과 경계이며, 남으로는 만리장성을 지나 중국과 구별되도록 되어 있다.
그 예상 판도는 산해관(山海關) 이북, 장자커우(長家口) 이동의 직례성(直隷省)과 내몽골과 성경성(盛京省)과 길림성(吉林省)과 러시아령과 중국령을 포함한 흑룡강성(黑龍江省)과 연해주와 캄차카 전부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3월 28일자에는 그 영역은 3단계로 나누어 확장될 것이라고 했다. 제1기는 길림성 전부와 봉천성(奉天省)의 일부로, 제2기는 봉천성의 나머지 부분과 산해관 이북 장가우 이동의 장성 이북인 직례성 북부와 내몽골이며, 제3기는 러시아-중국 양국에게 갈려진 흑룡강성 전부와 캄차카반도를 포함한 연해주 전부이다.
‘대고려국’의 수도는 발상지인 간도(間島)로 정해져 있다. 간도에서 북으로 내려가 혼춘(琿春)의 동쪽 포시에트만 머리의 노브고로드 땅은 금(金)나라의 동경(東京)이었으므로, 이 땅은 장차 ‘대고려국’의 중요한 일본해로의 출구가 될 것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일단 ‘대고려국’을 건국하고 영토를 늘려나가겠다는 것인데, 여기서의 의문점은 이웃 국가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침략이나 혹은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영토를 건국하기도 전에 늘려나가겠다고 공언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만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는 일본으로서는 그 두 나라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으로, 일단 간도를 중심으로 나라를 건국한 후에 영토를 늘려나가겠다고 미리 공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단지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야욕을 더 크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당시에는 연해주가 러시아령으로 되어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연해주를 넘어 러시아 북쪽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캄차카반도까지 거론한 것을 보면 대륙지배에 대한 야심을 거침없이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야욕 중 하나로, 금나라의 동경이었던 포시에트만 머리의 노브고로드 땅이 일본해로의 출구가 될 것이라고 한 점을 보면, 일본과 만주 및 캄차카반도까지 연결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설령 캄차카반도까지는 진출하지 못할지라도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대륙에서 일본으로 직항할 수 있는 항구를 확보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포시에트만 노브고르드가 연해주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즉, 연해주가 만주에 포함되는 영토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연해주를 반드시 확보하여 만주 전체를 병탄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서 러시아가 새로운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니콜라이 2세가 집권하던 그대로였다면, 일본은 만주국 건국 당시 만주의 일부분이 분명한 연해주를 만주국 영토에 포함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8회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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