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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승가연합 총재 상산 |
한국 사회는 다종교 사회다.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만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어느 하나의 종교가 압도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여타의 종교는 있으나마나한 경우라면 다종교 사회로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다종교 사회의 충분조건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는 하나의 위기일 수도 있다.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절대시한다. 종교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종교인은 누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절대적 확신과 함께 그것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21세기 우리 현실은 엄청나게 변화하고 발전했다. 일찍이 오늘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육체적으로 편리하게 살아본 역사는 거의 없다. 그런데 결과로서의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일찍이 그 누구도 생명평화를 꿈꾸고 모색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내 생명이 살고 싶은 삶 내 생명이 누리고 싶은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평화이다. 내 생명이 안전하게, 건강하게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고 그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뭇 생명들의 원초적 바람이다.
인간의 마음 상태, 삶의 문제, 영혼의 문제, 불(佛)과 그리스도 및 신(神), 종교는 내세의 문제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교의 관심은 결국 인간 구제의 문제로 압축, 요약될 수 있다.
베버는 『세계종교의 경제윤리』에서, 현세 거부적인 구제 추구의 두 방향을 들고 있다. 하나는 명상적· 신비적인 방향이며, 또 하나는 행동적, 금욕적인 방향이다. 전자는 신의 힘의 비인격화 및 내재화와 내면적 친화성을 갖고, 후자는 현세를 초월하는 창조신이라 하는 개념과 관계가 있다.
베버 종교사회학의 특질이 동서 비교라 하는 점에 제종교의 위치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세 거부적인 구제 추구의 두 가지 유형으로 설정된 명상적 신비적 방향과 행동적 금욕적 방향에서 불교는 전자의 전형이며 후자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이 대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명평화 운동 진영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대승불교 수행론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보면 우주의 존재 법칙인 보편적 진리 즉 사랑의 법칙에 따라 살면 고통으로부터 해탈한다. 또는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다.
사람이 종교를 갖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사람은 왜? 공포심을 갖는 것일까? 만물은 왜 주인이 있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공포심을 갖는 것은 일단 사람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졌기에 그렇다. 완전한 내가 없는 것이 오히려 우리라는 개념을 더욱 완전하게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조각으로 지어진 게 아니라 우리[大我]라는 공동체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즉,小我인 나보다 大我인 '우리'가 먼저 지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불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인연으로 생겼으며 변하지 않는 참다운 자아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정의다.
종교인의 삶에는 도덕성이 도덕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종교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도덕은 단지 가식일 뿐이다. 종교 안에 사랑이 없는 도덕이 없는 교리만을 위한 종교생활을 한다면 그 사람은 단순한 보여 주기식의 가식적인 종교생활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단순한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이유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그 교리가 적용될 수 없는 환경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사랑이 없는 교리만을 위한 종교는 결국 불행을 만들뿐이다.
그러나 대화를 그 본질로 하고 있는 종교 간의 만남은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종교적인 만남은 참으로 종교적인 것이어야 하며 특정한 호교론에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나 확신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다른 종교적 전통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참으로 만나고자 한다면 그 어떤 호교론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세계의 다양한 문화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서로 간의 무지와 오해의 심연에 다리를 놓기 위한 의사소통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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