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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숙 씨가 식당 근처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다정스럽게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이승민 특파원) |
[로컬세계 이승민 특파원] 취재가 있어 멀리 이바라기현 북쪽 우시쿠마을을 찾아갔다. 해는 중천에 떠있고 어디가서 점심식사나 할까하고 두리번 둘러보았다. 마침 한국가정요리집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내 고향 전주 비빔밥을 시켰다. 코로나 영향인지 식당이 한가했고 손님은 나 혼자뿐이었다. 한참 후에 주인 아주머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돌솟비빔밥을 들고 왔다. 얌전하게 생긴 얼굴이 천상 한국여인이었다. 아주머니는 밥과 반찬을 조용하게 식탁에 내려놓더니 씽끗 웃으며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내 앞에 앉았다.
50세 전후쯤 되어보였다. 나도 반가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부여 낙화암이 있는 동네에서 태어났다면서 백마강 강변을 뛰놀며 즐거운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어찌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됐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않고 웃기만 했다. 내가 먼저 나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주머니는 토끼 눈처럼 날 쳐다보며 “어쩌면 좋아”를 연신 안타까워하면서 내 이야기에 푹 빠졌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아주머니는 답례처럼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7세의 정연숙은 서울에서 우연히 김은섭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연숙은 은섭을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만다. 이상형의 남자를 만난 연숙은 하루하루가 꿈 같았다. 갈 수록 정은 깊어갔고 하루라도 안만나면 못 살 것 같았다.
은행원이었던 연숙은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은행에서 큰 돈을 빌려 서울에서 은섭이와 함께 살 집을 마련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 더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은섭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구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같이 살던 2001년 겨울, 아기가 태어나는 날이었다. 가장 먼저 달려와야 할 은섭이가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연숙의 저금통장을 들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방에 두었던 반지 목걸이 시계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전세금까지 받아서 모두 가지고 달아나버렸다. 아기의 탄생을 축하해줘야 할 은섭이가 오히려 연숙이와 아기를 짓밟아버리고 떠난 것이다.
집주인은 당장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밖에는 매서운 찬바람이 칼처럼 불어 살을 파고 들었다. 핏덩이 같은 아기를 업은 연숙은 갈 곳이 없었다. 춥고 배고파 아기는 등에서 울어댔다. 은행에서 빌린 전세금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갓난 아기를 업고 일을 할 수도 없어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찬바람은 피했지만 원금은 커녕 이자도 갚을 길이 없자 은행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왔다. 이자가 쌓이자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와 무자비하게 괴롭혔다. 인정사정도 없었고 짐승들 같았다. 연숙은 육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너무 힘들었다.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어린 아기를 놓아두고 죽을 수도 없었다. 연숙은 아기 이름을 선희라고 지어 어머니에게 맡기고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관광비자로 바다를 건너온 연숙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국식당에 들어가 일을 시켜달라고 사정했다.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아 한국으로 돌아가서 빚을 갚고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면서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다. 빚을 갚을 만큼 돈이 되기엔 아직도 턱없이 모자랐다. 3년이 되어가던 어느 날 도쿄에서 한국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지치고 힘들었던 마음을 이해해주었고 따듯하게 늘 위로해주었다. 왠지 이 남자에게 슬프게 살아왔던 인생을 보상받고 싶은 생각도 들었고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의지하고 싶었다.
타국에서 만난 한국인 남녀는 쉽게 정이 들었고 살림살이를 같이 하기에 이르렀다. 긴 불행의 늪을 벗어나 행복이 다시 찾아오는가 싶었는데 동거생활을 한지 1달도 되지 않아 이 남자도 역시 소리없이 떠났다. 일본에 와서 번 돈을 모두 가지고 가버린 것이다. 불법체류 중인 입장에서 경찰에 신고도 할 수가 없었다. 한국인 두 남자에게서 배신을 당한 고통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고국에서도 타국에서도 한국 남자에게서 배신을 당했다.
도대체 무슨 팔자가 이렇게도 기구하단 말인가. 앞길이 막막했다. 죽어야지 생각하면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빚쟁이들이 어머니까지 괴롭히고 있었다. 어머니가 불쌍하여 눈물만 나왔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보고 싶은 아기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연숙은 바닷가로 나갔다. 가슴 속에 쌓인 원망과 슬픔이 한이 되어 파도처럼 밀려왔고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아기와 어머니가 번갈아 머리에 떠올랐다. 눈물이 앞을 가렸고 몸은 어느새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날 붙잡아 모래밭으로 끌고 나갔다.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힘에 끌려 나갔다. 나를 끌고 간 사람은 일본 경찰이었다. 경찰이 자살자를 발견하고 놀라 달려오면서 소리쳐 불렀다고 했지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경찰은 시장골목으로 데려가 따뜻한 밥을 사주더니 찻집으로 이동하여 마주 앉았다. ‘노무라’ 경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경찰은 죽음을 선택한 사연을 물었다. 경찰은 직무상 연숙의 자살 동기와 체류 내력을 알아야 했고 연숙도 모든 슬픔을 토해내고 싶었다. 서울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일본에서 살아온 3년을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났지만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노무라가 손수건을 꺼내 말없이 연숙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측은지심인지 불법체류자를 놓고도 인정을 베풀어주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걱정이 태산처럼 밀려왔다. 불법 체류하다 붙잡혔으니 당장 경찰서 유치장 아니면 한국으로 추방 당하는 것뿐이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면 빚쟁이들에게 괴롭힘 당할 것을 생각하니 죽기보다 싫었다.
수심이 가득한 내 얼굴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노무라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노무라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이 이 근처에 있다고 하면서 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사실 난 갈 곳이 없었다. 두 번째 배신을 당해 번 돈 날리고 빚까지 지고 말았다. 한국에도 일본에도 가진 돈은 없고 빚만 남았다. 어머니가 계시는 집이라서 들어서기가 어색했지만 따라 들어갔다.
노무라는 어머니에게 애인을 데리고 왔다고 연숙을 소개를 했다. 어머니는 딸처럼 반겨주었다. 노무라는 연숙에게 짧은 한마디를 해주었다.
“내가 그동안의 고통과 슬픔을 모두 위로해주고 싶다 !”
노무라 경찰은 다음날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나의 불법적인 체류문제를 말끔하게 정리해주었고, 날 배신하고 사기친 한국 남자를 잡아와 내 앞에 무릎을 꿇렸다.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노무라 경찰은 원칙에는 청솔 같았다. 내가 일본에서 3년간 번 돈을 모두 받아주었고 연악한 여자를 사기친 정신적인 죄값을 치뤄야 한다며 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 남자는 날 위해 혼인신고까지 하여 날 구제해 주었다. 아마도 방법은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연숙은 노무라가 곁에 있어 든든함을 느꼈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노무라 경찰은 나에게 물었다.
“비자문제는 법적으로 완전히 해결 됐으니 이제 이혼신고를 하든지 아니면 나랑 같이 살든지 선택하세요.”
노무라는 경찰 신분으로 불법 체류자를 놓아줄 수도 없거니와 불법자와 결혼할 수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노무라 경찰의 배려는 날 위한 동정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연숙은 그동안 피곤하게 살아온 인생이 또 다시 반복될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노무라에게 남은 인생을 의지하고 싶었다. 노무라의 손등에 키스를 해주었다.
노무라는 자신의 부모형제를 초대하고, 한국에서 어머니와 선희를 초대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올린 연숙은 남편의 고향집 근처에 한국식당을 차려 스스로 직장도 만들었다. 노무라는 한국 빚도 갚아주었다. 착하고 너그럽고 좋은 남편을 만난 연숙은 지금 친정 어머니와 딸 선희를 옆에 두고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야기를 마친 연숙 아주머니는 “내 인생에서 사랑이라는 신의 선물은 나중에 있었다”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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