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주로에 피어난 첫사랑 특공화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6-23 12:17:40
"날 잊고 행복해줘" 연인의 마지막 배려…
81년간 지켜온 지고지순한 사랑
[로컬세계 = 이승민 도쿄 특파원] 81년이라는 모진 세월이 흘러 세상 모든 것들의 빛이 바랬건만, 102세 백발의 요시코(가명) 할머니의 사진첩 속 '그 사람'은 여전히 19세 앳된 군인 모습 그대로 멈춰 있다.
초여름의 길목마다 일본 가고시마의 옛 활주로 터를 붉고 노랗게 물들이는 '특공화(特攻花)'. 사람들은 그 꽃을 보며 전쟁의 잔혹함과 광기를 말하지만, 요시코 할머니에게 그 꽃은 눈을 감으면 금세라도 온기가 전해질 것 같은 첫사랑의 숨결이자, 80여 년간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한 연인 하야시 다카시(가명)의 얼굴이다.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19세 조종사, 그리고 다가온 이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절, 소년 다카시는 조종사가 되기 위해 엄격한 규율 속에서 피나는 노력과 혹독한 비행 훈련을 견뎌냈다. 마침내 능숙하게 전투기를 몰 수 있는 당당한 해군 조종사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열아홉이었다. 제복을 입은 다카시는 늠름했지만, 요시코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많고 다정한 소년일 뿐이었다.
내일의 생사를 알 수 없던 엄혹한 기지 주변에서 두 사람은 운명처럼 만나 서로의 전부가 되었다. 그러나 잔인한 시대는 그들에게 긴 행복을 허락지 않았다. 1945년 8월 13일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기 불과 3일 전, 전황이 악화되면서 다카시에게 "오키나와로 출격하라"는 사실상의 사형 선고인 자살 특공 명령이 떨어졌고, 출격을 단 하루 앞둔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적막한 방 안,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내던 다카시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빨간 마후라와 손때 묻은 만년필을 조용히 요시코의 손에 쥐여주었다. 요시코는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활주로 가에서 꺾어둔 붉은 꽃송이를 다카시의 제복 가슴에 소중히 꽂아주었다. 훗날 사람들이 '특공화'라 부르게 될, 가냘프지만 선명한 빛깔의 노란꽃이었다.
요시코는 다카시가 남긴 빨간 마후라를 목에 꼭 걸고 "제발 살아만 돌아와 달라"고 울부짖었지만, 다카시는 도리어 차갑고 모진 표정으로 요시코의 애원하는 손을 뿌리쳤다. 떨리는 입술로 건넨 그 모진 말은, 홀로 남겨질 연인의 삶을 향한 다카시의 깊고도 가슴 아픈 배려였다.
"이제 날 잊어줘.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줘. 나의 마지막 부탁이야."
오키나와 하늘에서 산화한 연인, 홀로 남겨진 81년의 세월
다음 날 아침, 다카시는 익숙한 조종석에 몸을 실었다. 가슴에 노란 꽃을 품은 그가 탄 전투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요시코는 다카시의 온기가 남은 빨간 마후라를 세차게 흔들며, 하늘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는 비행기를 향해 목이 터지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잊어달라"던 연인의 마지막 유언 같은 부탁과 달리, 요시코는 그날 이후 단 하루도 다카시를 잊을 수 없었다. 능숙한 조종 실력으로 거친 하늘을 갈랐던 다카시는, 그날 오키나와 인근 푸른 바다 위 공중전에서 산화(散花)하여 한 줌의 불꽃으로 사라졌다. 그의 가장 아름답던 열아홉 청춘도 그렇게 바다로 저물었다.
전쟁은 끝났고 세상은 비극을 빠르게 지워갔지만, 홀로 남겨진 요시코의 시간은 그 활주로에 영원히 멈추어 섰다. 연인이 남긴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유품을 평생의 부적처럼 품에 안고, 요시코는 마침내 102세의 백발노인이 되었다.
"미안해요, 당신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
102세 요시코 할머니가 살아 숨 쉬는 한,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의 시대를 증언하는 가장 뜨거운 역사다. 매년 5월과 6월, 지천으로 피어나는 노란 특공화를 바라보며 할머니는 사진 속 다카시의 앳된 얼굴을 주름진 손으로 가만히 어루만진다.
"당신은 나보고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라고 했지만… 내 마음에 당신 아닌 누굴 들일 수 있었겠어요. 당신이 아니면 안 되는데 어떡하라고요…. 미안해요. 당신의 그 마지막 부탁만큼은 끝내 들어주지 못하고, 평생 당신 하나만 그리워하며 살았네요."
나라의 잘못된 광기로 인해 19살에 멈춰버린 젊은 조종사의 삶, 그리고 "날 잊어달라"던 연인의 애달픈 배려를 평생의 그리움으로 간직한 채 102세까지 지고지순한 사랑을 지켜온 여인. 초여름 바람에 가냘프게 흔들리는 붉은 특공화는, 비극적인 전쟁도 끝내 갈라놓지 못한 두 남녀의 애틋하고도 위대한 사랑을 오늘날 우리에게 눈물로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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