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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한 세계수도문화연구회 회장. |
공주는 "대왕께서는 항상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고 해 놓고 지금 와서 다른 집으로 시집을 보내려 하십니까 사나이도 식언을 하지않는데 임금님이 식언을 하면 이찌 됩니까 말씀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고 거절했다. 왕은 화를 내고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내 딸이 아니다. 너 마음대로 궁중을 떠나거라"고 말했다.
궁중에서 나온 공주는 온달의 집을 찾아 갔다. 온달의 어머니도 "집이 가난하고 누추하니 귀한 사람이 올 곳이 못 된다."고 거절했으며, 일을 나갔다 돌아오는 온달을 만나 청혼을 했으나 그도 "이런 산 속에는 어린 여자가 살 곳이 못 된다."고 거절을 했다. 공주는 싸립문 밖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다시 모자를 찾아가 자신이 찾아온 내력을 설명했다, "마음만 맞으면 한 알의 곡식과 한자의 옷감 만 있어도 잘 살 수 있다."눈 간청을 하여 온달과 부부가 됐다.
공주는 가지고 온 보물을 팔아서 전답을 사서 가정을 이루고 말을 사서 길렀다. 공주는 온달이 글 공부를 배우고 무예를 익히도록 했다. 나라에서 실시하는 매년 3월 3일 낙랑 언덕위의 사냥대회에 참석해 우승을 했다. 왕은 온달이 공주의 남편인 것을 알고 놀랐다. 그후 중국의 후주 무제가 요동을 쳤을 때 구원병을 요청하자 온달이 출전해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왕도 크게 칭찬하고 정식으로 예를 갖춰 사위로 맞이했다.
평강왕이 사망하고 양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신라를 쳐서 옛 고구려 땅인 한강 북쪽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 이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야단성 아래에서 그만 화살을 맞고 사망했다. 군사들이 온달의 장례식를 치루려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삶과 죽음이 결정 났으니 돌아 갑시다" 하면서 관을 어루만지자 관이 움직여 장례를 마쳤다.
지금도 충북 제천에는 온달산성이 있고 구리의 아차산 상대공원에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동상이 있고 구리시에서는 매년 온달장군 추모제향을 올린다. 온달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은 눈이 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마을을 다니며 식량을 얻어왔기 때문이였다. 사실은 온달이 바보가 아니며 효성이 지극하고 착하고 명석한 청년이었다. 남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는 효자였다.
평강공주는 어릴 때는 울기를 잘 하는 철부지 여아였지만 성장한 후에는 대왕이신 아버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려깊은 여성이며 남들이 바보로 보는 온달의 참된 모습을 꿰뚤어 볼 줄 아는 총명한 공주였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맞으면 잘 살 수 있다고 한 평강공주는 철없는 울보가 아니었다. 지금 세상의 남여들은 연애를 하거나 소개소를 통해 결혼해 살다가 쉽게 헤어지기도 한다. 이상적 상대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뤄 살기가 쉽지 않다.
남자는 바보 온달처럼 눈먼 어머니 모시고 착하게만 살다가 평강공주 같은 여자 만나 가정 이루고 공부해 출세한다면 행운이다. 그러나 지금의 남자는 여자를 맞이 할려면 스스로 노력해 직장도 있고 장군이 된 온달처럼 출세해야 한다. 그러나 출세한 장군 온달보다 바보 온달에게 있었던 효성이 더 중요하다. 온달이 그 귀한 본성을 지녔기 때문에 노력하니 장군이 되고 대형 관직에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평강공주는 자신의 신랑감으로 경제적 환경이나 사회적 지위를 보지 않고 남들은 바보라고 하지만 착하고 순수한 심성을 귀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더 귀한 교훈은 바보 남편을 바보라고 무시하지 않고 공부를 하도록하고 말을 타게 하여 훌륭한 장군을 만드는 일을 한 것이다. 부부가 서로 평강과 온달의 역활이 바뀌었다 하드라도 서로 무시하지 않고 기를 살려주고, 용기를 주면 상대를 재창조하는 기적이 부부사이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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