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학교 재건과 교회 수습
가산 털어 보낸 7만 원...상해 임시정부의 혈맥이 되다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21년 가을, 910일간의 혹독한 옥고를 치르고 서대문형무소의 철문을 나선 문윤국(文潤國) 지사. 그의 앞에는 환희 대신 처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 정주로 돌아온 문 지사를 맞이한 것은 승리의 환호가 아니었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들어선 그의 집은 이미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일제의 약탈과 방화, 그리고 가장의 부재가 남긴 상처는 깊고 잔인했다.
잡초만 무성한 집, 뼈만 남은 아이들
문 지사가 감옥에 있는 동안 가족은 ‘불령선인(不逞鮮人,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부르던 말)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문 지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잡초가 안방까지 치고 들어온 폐허였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가족의 모습이었다. 거사가 시작되기 전, 유학자 집안이자 존경받는 목회자의 가정에서 풍족하게 자랐던 아이들은 뼈만 남은 채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일제는 문 지사의 집안을 경제적으로 고사시키기 위해 농기구 하나까지 압수했고, 이웃들은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 밥 한 술 나누어 주기조차 꺼렸다.
7만 원의 영광 뒤에 가려진 ‘가족의 눈물’
문 지사는 출옥 후 남은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7만 원을 보냈다. 당시 정주 땅에서 손꼽히는 대지주였던 문씨 가문의 근간을 통째로 뽑아 조국의 제단에 바친 결단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족들이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문 지사는 자식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을 보면서도 독립 자금으로 약속된 돈에는 단 한 푼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에게 공금은 하나님의 것이자 민족의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무너진 제단을 세우고, 오산학교를 재건하다
일제의 칼날 아래 오산학교는 폐허가 되었고, 그가 사랑했던 교회와 양떼들은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온 문 지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눈물을 닦고 다시 망치를 드는 것이었다.
그는 출옥 직후 곧바로 오산학교 재건에 착수했고 정주의 덕흥교회, 덕산교회, 연봉교회를 돌며 신앙의 불씨를 되살렸다. 그러나 일제에 문윤국은 ‘위험 순위 1호’였다. 가택 연금에 가까운 삼엄한 감시와 일경의 끝없는 취조는 그를 질식하게 만들었다.
“미안하다, 그러나 가야 한다”
폐허가 된 집에서 며칠간 가족과 눈물을 흘리며 보낸 문 지사는 또다시 짐을 꾸려야 했다. 일경의 삼엄한 감시와 재구속의 위협 때문이기도 했지만, 상해에서 들려오는 임시정부의 다급한 소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린 자식들이 옷자락을 붙잡으며 울부짖을 때, 문 지사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족에게 남긴 것은 "하나님을 믿고 견뎌라"라는 짧은 당부와 텅 빈 곳간뿐이었다.
먼저 간 동지들과 유관순의 몫까지 짊어진 그는 1922년 어느 칠흑 같은 밤, 가족에게조차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 차가운 압록강 물결에 몸을 실었다.
상해에서의 고난, 그리고 ‘이름 없는 거인’의 길
상해에 도착한 문 지사는 안창호, 김구 등 지도부와 교류하며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목회자로서 망명객들의 상처 입은 영혼을 달랬고, 교육자로서 독립 이후의 나라를 이끌 인재 양성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일제의 집요한 암살 위협과 밀정들의 감시는 상해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배후에서 실무를 챙기고 자금을 조달하는 ‘조용한 혁명가’의 길을 택했다. 화려한 직함 대신 ‘독립의 거름’이 되기를 자처한 그의 모습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깊은 귀감이 되었다.
버려진 삶, 그러나 꺾이지 않은 긍지
문 지사가 망명길에 오른 뒤 가족은 정주를 떠나 산간벽지로 숨어들어야 했다. 누군가는 구걸을 하고 누군가는 남의 집 종살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단 한 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굶주림보다 무서운 일제의 회유 앞에서도 그들은 문윤국이라는 이름을 지키며 버텼다.
역사는 7만 원이라는 거액의 기부와 화려한 독립 투쟁을 기록하지만, 그 이면에는 소금기 밴 풀죽으로 목숨을 이어가며 아버지를 기다렸던 가족들의 위대한 인내와 희생이 있었다.
그의 망명은 영광을 찾기 위한 길이 아니었다. 오직 독립이라는 단 하나의 과업을 위해 자신의 명예와 가산을 아낌없이 던진 거인의 장엄한 헌신이었다.
–계속–
【企画連載:文潤国 ⑦】 鴨緑江を渡る文潤国の涙… 荒れ果てた家、 飢えに苦しむ家族
【LOCAL世界=李勝敏記者】 1921年秋。910日間にわたる過酷な獄中生活を終え、西大門(ソデムン)刑務所の重々しい鉄門を出た文潤国(ムン・ユングク)志士。だが、彼の前には歓喜ではなく、あまりにも凄惨な現実が待ち構えていた。
故郷の定州(チョンジュ)に戻った文志士を迎え入れたのは、勝利の歓声ではなかった。杖を突きながら足を踏み入れた我が家は、もはや人が住めるような場所ではなかった。日本帝国主義による略奪と放火、そして家主の不在が残した傷跡は、深く残酷なものだった。
雑草の生い茂る家、骨ばかりとなった子供たち
文志士が収監されている間、残された家族は「不逞鮮人(日本側が独立運動家を指した呼称)の家族」という烙印を押され、地獄のような日々を余儀なくされた。門を開けて入った文志士の目に飛び込んできたのは、雑草が奥の間まで浸食した廃墟であった。
何よりも胸を痛めたのは、家族の姿だった。独立運動が始まる前、裕福な儒学者の家系であり、尊敬される牧師の家庭で何不自由なく育った子供たちは、今は見る影もなく痩せこけ、互いの体温に寄り添いながら辛うじて命を繋いでいた。日本当局は、文志士の一家を経済的に枯死させるため農機具一つに至るまで押収し、近隣住民は災いが及ぶのを恐れて、一握りの飯を分け与えることさえ拒んだ。
「7万ウォン」の栄光の陰に隠された家族の涙
文志士は出所後、残った家産をすべて整理し、上海臨時政府へ7万ウォンを送金した。当時、定州で指折りの大地主であった文氏一族の根幹を根こそぎ引き抜き、祖国の祭壇に捧げた決断であった。しかし、その代償は家族がそのまま背負うこととなった。
彼の子供たちは、後に当時をこう回想している
「父は国を取り戻しに行きましたが、私たちはその日の晩に食べる草の根を探して山を彷徨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文志士は、我が子が飢えに喘ぐ姿を目の当たりにしながらも、独立資金として約束された金には一銭たりとも手を付けなかった。彼にとって公金は神のものであり、民族の最後の希望であったからだ。
崩れた祭壇を立て直し、五山学校を再建する
日本軍の刃によって五山学校は廃墟となり、彼が愛した教会と信徒たちは散り散りになっていた。しかし、満身創痍の体で戻った文志士が最初に行ったのは、涙を拭い、再び槌を握ることだった。
彼は出所直後、直ちに五山学校の再建に着手した。同時に定州の徳興(トクン)教会、徳山(トクサン)教会、蓮峰(ヨンボン)教会を巡り、信仰の灯を再燃させた。だが、当局にとって文潤国は「危険人物第1号」であった。自宅軟禁に近い厳重な監視と警察官による終わなき取り調べは、彼を窒息せんばかりに追い詰めた。
「すまない、だが行かねばならない」
廃墟となった家で数日間、家族と共に涙を流して過ごした文志士だったが、再び荷をまとめ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当局の厳しい監視と再収監の脅威もあったが、何より上海から伝わる臨時政府の急を告げる知らせを無視できなかった。
幼い子供たちが衣の裾を掴み泣き叫ぶ中、文志士はあえて後ろを振り返らなかった。彼は杖を頼りに、再び暗闇の中へと消えていった。家族に残したのは「神を信じて耐えなさい」という短い言葉と、空っぽの倉庫だけであった。
先に逝った同志たちや柳寛順(ユ・グァンスン)の想いまで背負った彼は、1922年のある漆黒の夜、家族にさえ行き先を告げぬまま、冷たい鴨緑江(アムノックァン)の流れに身を投じた。
上海での苦難、そして「名なき巨人」の道
上海に到着した文志士は、安昌浩(アン・チャンホ)や金九(キム・グ)ら指導部と交流し、臨時政府の精神的支柱としての役割を果たした。牧師として亡命者たちの傷ついた魂を癒やし、教育者として独立後の国を担う人材養成の計画を立てた。
しかし、執拗な暗殺の脅威と密偵たちの監視は上海でも続いた。彼は自らを表に出すことよりも、徹底して背後で実務を担い、資金を調達する「静かな革命家」の道を選んだ。華やかな役職の代わりに「独立の肥やし」となることを自任した彼の姿は、臨時政府の要人たちに深い感銘を与えた。
捨てられた人生、しかし折れぬ誇り
文志士が亡命の途に就いた後、家族は定州を離れ、山奥の僻地へと身を隠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ある者は物乞いをし、ある者は他家の奉公人として生計を立てた。しかし、彼らは「独立運動家の家族」であることを一度たりとも恥じることはなかった。飢えよりも恐ろしい当局の懐柔を前にしても、彼らは「文潤国」という名を死守して耐え抜いた。
歴史は、7万ウォンという巨額の寄付と華々しい独立闘争を記録する。だが、その裏側には、塩辛い草粥で命を繋ぎながら父を待ち続けた家族たちの、偉大なる忍耐と犠牲があった。
彼の亡命は、栄光を求めるための道ではなかった。ただ独立という唯一無二の過業のため、自らの名誉と家産のすべてを惜しみなく捧げた巨人の、壮絶なる献身であった。
(つづ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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