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강(高崗)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수립 선포를 하기 34일 전인 8월 28일에 심양(瀋陽)에서 열린 동북인민정부위원회 1차 회의에서 동북인민정부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동북인민정부위원회는 각계각층의 대표 303인으로 구성된 동북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4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공식적인 대표기관으로 동북인민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것이다. 이렇게 수립된 동북인민정부 관할지역인 동북지역은 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자신들의 수중에 넣기 위해서 투자한 것은 물론 만주국 건국 이후에도 공업기반시설을 잘 조성하여 중국 최대의 중화학 공업 지대가 되어 있었다.
![]() |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1940년대의 만주는 중국 산업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지위에 있었다. 마오쩌뚱이 ‘공화국의 장자(共和國長子)’라고 일컬을 정도로 풍부한 지하자원 및 농업생산량, 다양한 경공업, 중공업 산업시설, 교통기반시설을 갖추고 있는 정치경제적 최전선지역이었다.
석탄 생산량은 대략 전국의 49%, 철 78%, 철강재 93%, 전력 생산량 78%, 철도 선로양은 중국 전체의 42%를 보유한 것으로 보면 압도적인 산업지대의 위상을 갖고 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두 생산량이 전국의 50% 이상이었는데, 1930년대 만주가 전 세계 대두 생산량의 66.3%를 점유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전 세계 대두생산량의 절대적인 생산량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니, 공업은 물론 농업에서도 그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던 지역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일본이 아시아대륙으로의 진출을 위한 군사기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 만주를 군사적 요충지로 만든 것 역시 사실이다. 만주야 말로 동북아에서 가장 발달한 산업기지이자 농업생산지임과 동시에 군사적 전략지로 최고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만주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임박했던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에서, 소련 총리 요시노프 스탈린은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일찍이 러시아가 만주지방에서 갖고 있던 모든 특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연합국지도자들은 이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바람에 소련군은 5월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하여, 8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 8월9일 만주에 진격해서 8월15일 종전과 함께 만주국을 무장해제 시키고 만주국 황제 푸이를 체포하는 등 실질적으로 만주국을 해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소련이 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도 8월 8일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8월 11일 선봉을 시작으로, 8월 12일에는 나진을 점령하고 8월 13일에는 청진으로 진출했다. 이곳은 일본의 항복 후에도 전쟁이 계속되어 8월 16일이 돼서야 점령했다.
소련은 일본의 항복 선언을 무시하고 계속 진격해서 한반도의 함흥을 거쳐 중부의 개성까지 진출하여 점령했다.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 38선 분할 점령에 합의한 9월 2일보다 앞선 상황으로 소련은 이미 한반도의 38선 이북도 자신들이 점령할 대상에 추가시키고 있었기에 일본의 항복과는 무관하게 일본군을 핑계 삼아 진격하고 있던 것이다.
이것은 소련이 공산주의 국가를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점령한 영토들을 반환하지 않고 오히려 그 영토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수단의 방편으로 사용할 목적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러한 소련의 야심은 만주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만주가 일본에 의해서 점령된 뒤에 일본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국공산당 지하 게릴라들은, 중국 북부에서 온 공산군과 결합해 소련군의 비호와 무기 지원에 힘입어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한 이후 국민당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는데 앞장선다.
국민당이 창춘[長春]을 점령한 것은 1946년 6월이었다. 그런데 그때 창춘의 농촌지역은 이미 공산당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거의 50만 명에 이르는 국민당 정예부대가 창춘·심양·금주·영구[營口]에서 공산군에게 포위되었다. 1948년 말 국민당은 만주에서 군사적으로 완전히 항복했다.
이 사건은 1949년 국민당이 중국본토 전체를 공산당에 내주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게다가 장춘의 농촌지역을 점령한 공산당은 모든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지주세력을 완전히 제거 했으니 당연히 만주의 농민들은 공산당 편을 들었으며 국민당은 만주에서 패망한 것이다. 이렇게 들어선 공산당 정권하에서 가오강이 동북인민정부의 주석이 되면서 많은 백성들이 그에게 칭송을 보냈고, 그는 마치 황제라도 된 듯이 우쭐대다가 결국에는 마오쩌뚱의 눈에 나서 베이징으로 소환되었다.(16회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저작권자ⓒ 로컬(LOCAL)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