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구 챙기기·치적 쌓기용으로 전락…지방재정 악화 ‘주범’
개발위주 사업에 혈안…실패 땐 또 국민 혈세로 충당 악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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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경기도의회 경제투자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도 집행부의 경제 예산 축소 편성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경제투자위 소속 의원들은 도 집행부가 경제 예산을 확대 편성할 때까지 내년도 예산안 심의를 전면 보이콧하겠다고 밝혔다. 곳간이 비고 있다. 내년도 정부·지자체 예산 편성을 두고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이 공공의 이익보다 개인 입지다지기에 혈안이란 비판이 일고 있다. 노골적인 ‘선거용 지역구 챙기기’와 ‘치적 쌓기’로 국가와 지자체 재정건전성에 빨간불이 켜지고 있는 것이다.
국회 15개 상임위원회가 내년도 정부 예산안 예비심사에서 모두 11조4923억원의 예산을 증액한 것으로 드러났다. 불필요한 예산을 깎아야 정상인 의원들이 오히려 예산을 대폭 늘린 것이다.
이들이 추가한 예산 대부분은 지역민원 사업이다. 학교를 세우거나 도로를 만드는 등 선심성 예산이 많아지는 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입지다지기라는 분석이 나온다. 추가 예산을 반영하려면 그만큼 다른 데서 깎거나 국채를 발행해 빚을 내야 한다.
이러한 예산 ‘끼워넣기’는 관행이란 말로 정당화되는 게 현실이다. 한 의원은 “일부 비판적 시각이 있는 건 이해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의원으로서 당연한 요구”라고 말했다.
지방 정치권이라고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자체장들이 선심성 지역개발사업을 내세워 치적쌓기에만 열을 올리는 탓이다.
인천 강화·옹진군은 최근 국토해양부에 강화·옹진군 일원 346.7㎢(약 1억488만평)를 신발전지역 종합발전구역으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2020년까지 발전촉진지구와 투자촉진지구 31곳을 지정해 관광복합도시·산업단지 등을 건설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해당 부지면적이 강화·옹진군 행정구역의 60%에 달해 현실성이 없다는 게 중론이다.
타당성 검토 없는 선심성사업은 지자체 재정난으로 이어진다. 5년간 예산 7287억원을 들인 용인경전철은 수요 부족과 재정부담, 안전성 문제로 개통조차 못했다. ‘군자지구 개발’에 5600억원을 쓴 경기 시흥시는 빚이 예산의 40%를 넘어섰다. ‘호화청사’ 신축에 3220억원을 쏟아 부은 경기 성남시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김연식 강원 태백시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지난 6년간 태백시가 4400억원을 투입해 벌인 오투리조트 사업이 실패로 끝난 건 지자체장이 다음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지역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선심성 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자체장 치적 쌓기 위험수위18일 경남 김해시 장유면 행정개편시민대책위원회가 김해시청 기자실에서 부산김해경전철 사업 전반에 대한 감사원 국민감사를 청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선거를 앞둔 지자체장들의 치적쌓기는 심각하다. 타당성 검토 없는 선심성 사업 추진은 엉터리 개발사업으로 이어져 재정난을 가중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성과 내기에 눈먼 단체장들이 벌인 사업이 실패하면 국민 혈세로 빚을 갚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지방 재정자립도는 매년 낮아졌다. 올해 평균은 51.9%에 불과하다. 자체 수입으로 인건비도 못 대는 지자체가 절반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일부 지자체는 빚을 얻어 호화 청사를 짓고 선심성 행사와 축제를 벌이고 있다. 지방공기업의 방만한 재정 운용도 심각하다.
태백시는 오투리조트 건설에 투입된 은행 빚 1460억원의 원리금 상환을 독촉 받는 신세다. 인천시가 2009년 세계도시축전 사업의 일환으로 839억원을 투자한 일명 ‘은하레일’(월미도 순환 관광열차)은 여태껏 운행 한번 못하고 고철덩어리로 녹슬고 있다.
최근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지자체들이 경제성 없는 개발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 15개 광역자치단체 산하 도시개발공사의 부채비율이 2005년부터 2009년 말까지 4년만에 3배 가까이 급증했다. 총 부채규모도 35조에 이른다.
실제로 15개 공사는 2005∼2009년 중 22조7000억원의 공사채를 발행해 각종 개발사업에 쏟아 부었지만 상환액은 5조2000억원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
‘뻥튀기’ 수요예측 재정난 가중
이처럼 엉터리 개발사업이 계속되는 건 잘못된 수요예측의 영향이 크다. 지자체들은 전철, 터널 등 대형공사를 할 때 대부분 자체 예산을 쓰지 않는다. 민간 기업에 공사를 맡기고 수십년간 이익을 보전해주는 ‘최소 운영수익 보장(MRG)’ 방식을 많이 쓴다.
부산김해경전철은 개통 2개월이 지났지만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경전철을 운행해보니 계획 당시 예상 승객의 20%도 못 미쳤다. 부산시는 매년 400억원, 김해시는 700억원 정도를 20년간 부산김해경전철주식회사에 줘야 한다.
김해의 한 시민단체는 “경전철 계획 수립 당시 하루승객 수요를 17만6000여명으로 예측했으나 실제로는 3만1000여명에 불과해 엉터리 수요예측으로 판명됐다”며 18일 경전철 사업에 대한 감사를 청구했다.
용인경전철은 7287억원을 들여 작년 7월 완공했지만 운행조차 못하고 있다. 승객 수가 당초 예상에 훨씬 못 미치자 용인시와 민간사업자 간 갈등이 생겨 계약이 파기됐기 때문이다. 결국 법정 싸움으로 번져 시가 공사비 5159억원을 물어주라는 판결이 나왔다.
지자체 대형공사 실패의 근본 원인은 뻥튀기 수요 예측이다. 지자체는 기반시설이 필요한지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전문 연구기관에 맡긴다. 문제는 시설을 만들고 싶어 하는 지자체의 생각이 용역을 맡은 연구기관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현재 계획되거나 진행 중인 지자체의 대형공사에 대한 수요 예측이 정확한지 재점검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 전문가는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예측을 뻥튀기한 연구기관에도 책임을 지워야 한다”며 “지자체장과 지방의회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산 먼저 챙기는 의원이 임자?예산결산 특별위원회 정갑윤 위원장과 여야 의원들이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조정소위원회(계수조정소위) 회의를 하고 있다. 위원회는 각 상임위에서 제출한 예산을 최종 검토해 법정기일인 12월2일까지 내년도 살림규모를 확정짓는다. 내년 총선을 앞둔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선심성 사업과 복지 예산 확보에 ‘올인’하면서 정부의 재정건전성 악화가 불가피해졌다.
정부가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을 심의하고 있는 국회 상임위는 경쟁적으로 예산을 늘렸는데, 지역구 사회간접자본(SOC)과 복지 관련 예산 증액이 두드러진다. 내년 총선을 겨냥한 의원들의 민원성·선심성 예산 늘리기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국토해양부 예산은 4조8500억원 가량 급증했다. 반면 감액 요구는 4000억원에 그쳤다. 호남고속철도 건설 예산 450억원을 늘렸고 SOC 관련 예산 수십개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정부가 도로망이 충분하다는 이유로 예산에 넣지 않았던 도로사업도 20개가 국회에서 추가됐다.
보건복지위원회에서는 기초노령연금 관련 예산, 보육 예산(각각 5876억원, 1774억원 증액) 등을 중심으로 1조385억원이 확대됐다. 여야가 ‘복지경쟁’을 벌이면서 예산이 대폭 늘어난 것이다. 농림수산식품위원회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피해보전 예산 3403억원을 포함해 소관기관의 예산 총액을 총 5774억원 늘렸다.
지난달 27일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는 아예 문까지 걸어 잠그고 회의를 열었다. 속기록도 남기지 않는 밀실 회의에서 나랏돈을 아끼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각 상임위에서 무리하게 요구한 선심성 예산은 예결특위에서 과감히 삭감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럽 각국이 재정위기로 국가부도의 벼랑에 몰린 것을 보고도 선심성 예산 증액 경쟁을 벌이는 포퓰리즘 행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국회는 올해 예산을 정부안보다 5000여억원 가까이 깎아서 통과시켰다. 2009년에는 1조원 가량 감액이 이뤄졌다. 올해 유례없는 증액 예산이 통과되면 여야 모두 세금으로 표 사려고 나라 살림을 망쳤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자체·국회의원 선심성 포퓰리즘 막으려면…지자체의 선심성 사업에 따른 재정 부실을 막으려면 파산제도 등 특단의 대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지자체 파산제도는 방만한 경영으로 부도에 놓인 지자체에 대해 파산을 선고해 법적 책임을 지게 하는 것으로 미국, 일본 등 지방자치 선진국들이 도입해 운영 중인 제도다.
호화청사나 선심성 행사, 축제 등 비효율적 재정지출의 원인은 지자체의 재정 책임감이 약하고 주민과 중앙정부의 감시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지자체들은 강력한 제제 장치가 없어 책임감이 떨어진다. 중앙정부가 파산을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암묵적인 믿음은 선심성 사업 남발과 방만한 재정운용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대안으로 파산제도를 도입해 예산운영의 도덕성을 높이자는 의견이 나온다. 지자체의 과세자주권 강화, 지방재정 조기경보제 도입, 주민참여예산제 강화도 한 방법이다.
국회의원들의 마구잡이식 예산 증액은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드러내고 있다. 일부 의원들은 ‘상임위에 올려놨는데 예결위에서 깎았다’는 핑계를 내려고 무턱대고 증액부터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역구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는 핑계를 댈 수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쪽지예산, 선심성 예산 등 논란을 불식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요구된다.
예산 뻥튀기를 없애려면 미국·유럽의 의회처럼 각 상임위별 증액 한도를 미리 정해주는 ‘예산 상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미국의 예산편성원칙인 ‘페이고(PAYGO, Pay As You GO)’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페이고는 신규 재원을 필요로 하는 사업을 추진할 경우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재원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예산안의 국회제출시한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부가 10여개월 이상 편성한 예산안을 실질적으로 30여일만에 심의·의결하는 것은 무리인 만큼 예산결산위원회의 총괄심사, 상임위원회의 세부심사, 예산결산위원회의 종합심사 등으로 예산심의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심의기간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선거용 예산 챙기기에만 급급한 국회의원들을 표로 심판하는 유권자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뉴스룸 = 박형재 기자 news34567@segye.com
- 기사입력 2011.11.25 (금) 10:48, 최종수정 2011.11.25 (금)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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