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우 칼럼] 고구려 초기 영역-만주의 영토권(Ⅷ)

마나미 기자

| 2024-05-23 11:43:27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17년으로 재정립하면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에 기록된 고구려 초기 영토에 대해서도 그 연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기원전 37년으로 정립된 고구려 건국 당시의 영역은 기원전 217년의 고구려 영토영역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추모왕 시절의 사람으로 기록된 대소, 오이, 마리, 협보, 부분노, 부위염 등에 관한 기사가 동반된 영토확장은 초기 영토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연대를 앞당겨 초기 영역으로 재정립해서는 안 된다.

1대 추모왕은 세손 삭감에 관여되지 않았음이 명백함으로 일어났던 모든 기록은 180년을 앞당겨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2대 유리왕부터는 세손 삭감에 관여되어 있는 관계로 기록된 사건을 무조건 180년 앞으로 당겨보는 것은 무리다. 세손 삭감을 위해 합쳐진 왕들의 기록으로 인해서, 각각의 왕들과 사건에 대한 기록이 얼마나 앞당겨져야 하는지를 구분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리왕부터 태조대왕 재위 마지막까지 180년이 나누어지고, 차대왕 즉위년부터는 원래 기록된 연대와 같이 가야 하는데 그걸 나눌 기준이 없다. 다만 평균적으로 생각해서 어느 정도 소급되어야 하는지는 계산할 수 있기에 적어도 대무신왕까지는 한사군이 설치된 기원전 108년보다는 앞선 기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삼국사기'에 보면 대무신왕 3년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두 개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오는 기사가 나온다. 대소가 추모왕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금와왕의 맏아들로 추모왕이 동부여에 있을 때 추모왕을 처단할 것을 제안할 정도의 나이였으니 최소한 10~15세 이상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가정하에서 볼 때, 기원전 217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으니 기원전 108년까지 대소가 살아 있었다면 119~124세 이상 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무신왕 재위까지는 기원전 108년 이전이라고 볼 수 있고, 그때까지의 고구려 영역은 한사군의 위치와 관계된 영역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연도를 소급해야 하는 문제를 제외하면, 고구려의 영토변천 과정은 '삼국사기'에도 잘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명왕은 즉위하자마자 인접해 있는 말갈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말갈을 공격해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입하지 못했다. 동명왕 2년에는 비류국으로부터 송양이 항복해와 그 땅을 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우두머리로 삼았다고 했으니, 비류국을 제후국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6년에 행인국과 10년에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는 등 압록강 유역을 확보하여, 백두산 부근과 두만강 하류의 동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간다.


유리왕 11년에는 부분노(扶芬奴)가 약한 병력으로 남쪽을 공격하다가 도망치면 선비가 쫓아 올 것이고 그때 부분노가 정예병을 이끌고 성으로 달려 들어가면 선비가 놀라 되돌아올 때 왕이 군사를 이끌고 후방을 공격하면 승리한다는 계책으로 선비를 복속시킨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 기사에 대해서 일본 사학자 쓰다쇼우기치(津田左右吉)는 선비의 거주지역이 대흥안령산맥의 남쪽에 있는 요하의 한 지류인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 유역의 내륙지방이고 고구려 중심지는 압록강 변에 있어서 서로 인접할 수가 없으므로 고구려가 선비를 공격하였다는 이 기사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림] 시라무렌강과 의무려산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구려 발상지인 첫 수도에 대해 알고 있는 일반적인 통설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배제한 이론이다. 고구려 발상지를 올바르게 인식하면, 고구려가 [그림]에 표기된 시라무렌강 유역의 선비족을 복속시켰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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