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문윤국 ⑨]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이념의 갈등을 중재하다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5-05 18:20:42

총성보다 무서운 분열, 그 한복판에 선 문윤국 
적은 외부에 있는데 어찌 동지끼리 칼을 겨누는가
7만 원’의 진정성이 보여준 화해와 결속의 힘
밀정과 암살의 위협,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 방벽
상해 임시정부 간부들이 분열될 때마다 중재 역할을 하는 문윤국. 사진 이승민 기자(AI로 당시 상황을 복원)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20년대 중반의 상해는 독립운동의 성지인 동시에 거대한 혼란의 용광로였다. 외교 우선론, 실력 양성론, 무장 투쟁론이 거칠게 충돌했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유입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진영 간의 대립은 임시정부의 존립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이역만리의 고단한 삶과 부족한 자금은 동지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세웠으며, 때로는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불신하고 밀정으로 의심하는 비극이 연출되기도 했다.

 총성보다 무서운 분열, 그 한복판에 선 문윤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발을 디딘 문윤국(文潤國) 지사 앞에 놓인 현실은 참혹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그 궁핍함은 서로를 향한 날 선 비판으로 돌아왔다. 특히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싼 분열은 총칼을 든 일제의 위협보다 더욱 치명적인 내부의 적이었다.

40대 중반의 문 지사는 이념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냉철함을 유지했다. 그는 정주 오산학교 시절부터 다져온 ‘교육 구국’의 신념과 목회자로서의 ‘화평’의 리더십을 무기로 갈등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임시정부 회의장이 파벌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될 때마다 그는 꼿꼿하게 일어나 사자후를 토했다.

“우리가 정주 장날 피로 그린 태극기를 흔들 때, 공산주의자가 어디 있었고 민족주의자가 어디 있었는가! 오직 조선의 아들딸만 있었을 뿐이다.”

 7만 원’의 진정성이 보여준 화해와 결속의 힘

문 지사가 이념과 파벌을 넘어선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의 청렴함과 헌신이었다. 가산을 통째로 털어 마련한 7만 원이라는 거금을 조건 없이 바친 그의 숭고한 결단 앞에, 사사로운 권력을 탐하던 이들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문 지사는 자금이 끊겨 굶주림에 허덕이는 분파의 거처를 남몰래 찾아가 자금을 나누어 주며 투쟁을 독려했다. 그는 “이 돈은 내 개인의 돈이 아니라 조선의 민초들이 낸 혈세”라며, 파벌을 넘어 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하나가 될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의 거처는 상해 망명객들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념의 벽을 허무는 ‘영적 쉼터’이자 ‘화해의 공간’이 되었다.

밀정과 암살의 위협,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 방벽

당시 상해의 어두운 골목은 일제의 밀정들이 독버섯처럼 피어오르던 위험한 곳이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암살 시도가 빈번했고, 내부 분열을 조장하는 일제의 이간질은 교묘했다.

문 지사는 늘 암살 위협의 중심에 있었지만, 경호원 없이 낡은 성경책 한 권을 품에 안고 거리를 나섰다.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동지를 팔아넘기라는 협박 앞에서도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내 육신은 저들의 흉탄에 쓰러질 수 있어도, 내 영혼 속에 깃든 독립의 제단은 무너뜨리지 못한다.”
40대 중반의 젊고 당당한 목회자가 보여준 이 굳건한 기개는 혼란에 빠진 상해 독립운동 진영에 거대한 정신적 방벽이 되었다. 그는 총칼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인간적 존엄’과 ‘독립의 본질’을 지켜낸 고독한 수호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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