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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17년으로 바로 잡으려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한사군의 위치와 직결되며 그것은 고구려 영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연대가 중국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기원전 108년 이전이냐 이후냐에 따라서 한사군이 한반도에 위치했다는 설과 요하서쪽에 위치했다는 끝없는 논쟁에 대한 종지부도 찍을 수 있다. 고구려가 기원전 217년에 건국되었다면, 기원전 108년의 고구려 영역에 따라서 한사군의 위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전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의 손영종은 광개토대왕릉비에 17세손으로 기록된 세손을 12세손으로 기록한 '삼국사기'의 세손 삭감이 고구려 건국 역사를 삭감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삼국사기'에 중복, 혹은 합산되어 기록되었을 5세손의 왕 중에서 4명을 찾아내고 한 명은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삭감된 왕들의 재위연수를 구하기 위해서 유리왕부터 5세손에 해당하는 10명의 왕 재위연수를 합산하고, 진나라와 국경을 마주한다는 가정 하에, 갑신년을 추정하는 방법으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정의했다.
고구려 건국연대를 다룬 사서에서는 일률적으로 고구려 건국연대를 갑신년이라고 하니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영종의 이론에서 부각되는 커다란 모순은 초기 5세손에 해당하는 10명의 재위연수를 모두 한산한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왕국 초기에는 불안정한 왕권에 의해 왕위 쟁탈전을 벌이다 보니, 장자 세습이라는 원칙이 반드시 지켜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5세손이라는 말에 얽매여 5세손 10명을 모두 더한 것 자체가 무리다.
정상적인 왕위계승이었다면 5세손은 5명이라는 점을 참고했어야 한다. 이런 의문에 접한 필자는 손영종이 찾지 못한 5번째 왕을 찾으려고 노력한 결과 태조대왕과 국조왕이 합산되어 태조대왕이라고 기록된 왕임을 밝혔다.
또한 손영종은 고구려가 진나라와 국경을 마주할 것으로 가정했는데, 고구려는 신조선 영역에 건국되어 진나라와 국경을 마주하지 않았다. 진나라는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가 멸망시킨 위만이 통치하던 번조선과 국경을 마주했을 뿐이므로 굳이 그런 추론은 필요가 없었다. 이런 모순을 바로잡아 필자는 2019년 3월 '간도학보'에 게재한 논문 「고구려 건국연대의 재정립에 관한 연구」에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17년으로 재정립하였다.
고구려가 기원전 217년에 건국되었다면, 보장왕이 항복한 668년까지는 885년이 되고 보장왕이 죽음으로써 왕조가 완전히 막을 내리는 682년까지는 899년이 되어 '고려비기'에 ‘고구려가 건국된지 900년에 멸망한다’고 '삼국사기'와 '당회요'에 기록되어 있는 ‘유국 900년 설에도 딱 맞는다.
또한 기원전 221년과 206년 사이에 위치하므로 전회에서 언급한 진.한의 동북에 자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연대는 기원전 217년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기원전 217년에 건국된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요하 서쪽에 그 영역을 설정했다.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이 요하 서쪽 의무려산과 의현 일대라는 설이 인정받고 있으며, 제2대 유리왕 때에는 부분노의 계략 덕분에 요하 서쪽 시라무렌강 유역의 선비족 땅을 점령했으니, 이미 요하 서쪽 영역을 견고하게 했다.
그리고 한사군이 고조선을 침략한 기원전 108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대무신왕 재위 때까지 북으로는 부여 왕 대소의 목을 벰으로써 실질적으로 부여를 복속하고 평안도에 있던 최리의 낙랑국을 점령한 것은 물론 동명왕 때 두만강 하류의 동해까지 그 영역이 뻗어있었으니 만주 전역과 평안도까지를 영역으로 삼은 것이다.
한사군이 침입하던 기원전 108년에 만주 전역과 평안도까지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었으니 한사군이 한반도나 만주에 설치되려면 당연히 고구려와 전쟁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 무제와 고구려의 전쟁에 대한 기록은 그 어느 사서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 건국연대가 200여년 소급된다는 가정하에, 대무신왕과 한나라의 전투에 대해 기록했지만 그 역시 한나라가 패퇴한다. 따라서 한 무제는 그 당시 위만이 통치하던 고조선의 영역 중 하나인 번조선을 복속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한사군을 설치하는 데 만족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한사군은 요하 서쪽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한족은 만주에 어떤 문화적인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따라서 한족의 중국은 만주에 대한 어떤 문화적인 권리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역사는 물론 영토권에도 나설 명분이 없는 것이다.
고분을 발굴하던 중에 조각이 두어 개 모자라는 유물이 나왔는데, 누가 보아도 작은 원형 항아리였다. 그런데 조각 두어 개가 없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그건 옳지 않다. 다른 재질을 이용해서 부족한 조각 부분을 만들어서라도 원형으로 복원하는 것이 유물을 올바르게 관리하는 방법이며, 연구자의 자세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건국연대가 기원전 217년이라는 정황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은 물론 그렇게 되면 역사가 순조롭게 이해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기원전 37년을 고집하는 것은 연구자는 물론 후손으로서의 자세도 옳지 않은 것이다. 고구려 건국연대만 기원전 217년으로 바로 잡으면 만주의 영토권에 대한 문제가 순조롭게 풀린다. 지금이라도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 학문을 하는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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