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엇갈린 두 거목의 발자취
지상에서의 상봉은 없었으나 정주의 핏줄로 이어진 위대한 사상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50년대 초, 포화가 한반도를 뒤덮던 가혹한 전란의 시기, 남평 문씨 정주 가문의 두 거목 문윤국과 문선명은 남한 땅 서로 다른 좌표 위에서 각자의 거룩한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1921년 일가친척과 신도들을 설득해 전 가산인 거액 7만 원을 상하이 임시정부 자금으로 바친 후 일제의 삼엄한 표적이 되었던 문윤국(文潤國) 지사. 그를 체포하기 위한 일제 경찰과 기밀 기관의 그물망은 날이 갈수록 숨통을 조여왔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추격전 속에서 문 지사는 일경의 체포망을 피해 때로는 상하이의 어두운 밀실로, 때로는 충북 괴산과 강원 강릉 등 조선의 가장 깊숙한 오지와 험지로 몸을 숨겨야 했다. 해방 전까지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감춘 채 밤낮으로 밀행해야 했던 이 숨 막히는 잠행의 세월은, 가족들조차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할 만큼 고독하고 비장한 투쟁이었다.
해방 공간의 광기를 뒤로한 고결한 은둔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맞이했으나, 조국은 좌우의 잔인한 유혈 대립과 친일 경찰의 부활이라는 또 다른 혼란과 광기에 직면해 있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상하이 임시정부 출신들이 장관과 국회의원직을 맡으며 당당하게 정계 전면에 나설 때, 유독 문윤국 지사만은 깊은 환멸을 안은 채 다시 숨 가쁜 발걸음을 옮겼다.
고향 정주의 공산화와 조만식 선생의 억류라는 비극 속에서 실향의 아픔을 안고 남하한 그에게, 독립은 해방 후의 권력이나 명예라는 보상을 바란 투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포끼리 칼을 겨누는 세속의 화려한 권좌와 패거리 정치를 뒤로하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철저한 기독교적 신조와 선비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그는 1946년부터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의 장열리와 노루목 일대 깊은 산골로 들어가 신분을 숨긴 채 고결한 침묵의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범냇골 토굴의 구도자와 정선의 위험천만한 전선
같은 시간, 그의 종손자 청년 문선명(文鮮明)은 3·8선 저 너머 북한 흥남감옥의 모진 고문과 죽음의 수용소 사선을 뚫고 탈출해 남하하고 있었다. 1951년 1월 부산에 도착한 문선명은 범냇골의 척박한 토굴에서 전도를 시작하며 1952년 《원리원본》을 집필하고, 1954년 서울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는 등 교단 기틀을 다지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다.
당시 강원도 정선은 북한군 제2군단 패잔병과 이현상 부대 등 빨치산 세력이 득실거려 민간인의 출입이 극도로 통제된 위험천만한 전선이었다. 부산과 서울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문 총재가 연고도 없는 정선의 화전민 마을을 뒤져 은둔 중인 종조부를 만날 물리적·시간적 가능성은 희박했다. 두 사람은 끝내 지상에서 상봉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엇갈린 시공간의 거리는 전쟁이 남긴 가혹한 비극인 동시에, 가문이 품은 사상의 대물림을 더욱 장엄하게 증명하는 배후가 되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사상의 대물림
비록 지상에서는 생사조차 모른 채 끝내 상봉하지 못했으나, 정주 오산학교에서 할아버지 문윤국이 뿌린 민족 정신과 철저한 기독교적 신조는 손자 문선명의 핏줄을 통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문윤국 지사의 삶은 철저한 무명(無名)의 길이었지만 그가 일제의 감옥과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속에서 피눈물로 지켜낸 결백한 도량과 정결한 신앙 신조는 손자에게 고스란히 유산으로 상속되었다.
문선명 총재는 생전 여러 강연과 증언을 통해 종조부 문윤국 목사의 오산학교 시절 업적과 임시정부 자금 지원 사실을 높이 기리고 자랑스러워했다. 비록 그의 증언들은 대부분 "조국을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가문과 재산을 바치고 고초를 겪다 가신 훌륭한 어른"이라는 사후적 추모와 기억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영적 교감의 밀도는 그 어떤 물리적 대면보다 뜨거웠다.
할아버지가 일제와 공산 빨치산의 광기 앞에서도 “내가 대신 죽으리라” 하며 마을 청년들을 지켜내고 한학과 사랑 사상을 가르쳤던 그 숭고한 기품은, 손자 문선명에 이르러 원수까지도 형제로 품어 안는 거대한 '세계 평화 운동'으로 찬란하게 개화했다.
정선의 침묵에서 평양의 평화로, 무한히 확장된 영적 영토
문윤국 지사가 1958년 1월 정선의 외딴 거처에서 조용히 별세했을 때, 그가 남긴 수많은 한시와 서예 작품들은 고결한 침묵의 열매로 정선 땅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 영적 거름을 자양분 삼은 손자 문선명은 냉전의 벽이 여전히 공고했던 1991년 12월, 목숨을 걸고 북한 평양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는 위대한 결단을 내린다.
과거 청년 시절 평양 내무서와 흥남감옥에서 공산 체제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고초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선명은 할아버지가 정선의 밤하늘에 올렸던 ‘동포를 향한 초이념적 화평의 기도’와 하늘의 뜻을 가슴에 품은 채 원수였던 김일성 주석과 만나 서로를 "형님", "동생"이라 부르며 극적인 의형제의 인연을 맺었다.
증오를 사랑으로 녹여내며 평화자동차를 세우고 보통강호텔을 건립하여 북한 땅에 독점적 신뢰의 자산을 심어놓은 문선명의 행보는, 서울의 화려한 권좌를 버리고 황무지에서 지행합일을 가르쳤던 할아버지 문윤국의 대국적인 도량과 완벽하게 일치를 이루는 역사의 거대한 울림이었다.
거대한 섭리의 복선, 능라도에 펼쳐진 가문의 기적
역사는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는 정교한 섭리의 지도를 통해 거둔 자와 뿌린 자의 위업을 연결한다. 문선명 총재가 김일성 주석과의 의형제를 시작으로 북한 최고 지도부와 대를 이어 닦아놓았던 그 거대한 평화의 길과 영적·경제적 영토 위에서, 세월이 흐른 2018년 문선명의 방계 조카벌인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최고 수반 자격으로 평양 순안공항에 내리게 된다.
남평 문씨(南平 文氏) 정주 가문의 대동항렬자(大同行列字) 규정을 기준으로 볼 때, 두 사람은 씨족적 뿌리 안에서 항렬상 한 대수 차이가 나는 아저씨와 조카 관계다. 족보상 '명(明)'자 항렬을 쓰는 문선명 총재는 남평 문씨 31세손으로 집안의 아저씨가 되며, '재(在)'자 항렬을 쓰는 문재인 전 대통령은 32세손으로 조카벌이 된다.
이러한 가문적 배후를 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15만 평양 시민이 모인 능라도 경기장 단상에 올라 평화의 연설을 토해내던 그 경이로운 자리는, 결코 한 정치가 개인의 힘만으로 열 수 있는 빗장이 아니었다. 집안의 아저씨벌인 문선명이 평양 땅을 걸으며 심어놓았던 거대한 신뢰의 자산과, 북한 지도부가 그 가문에 대해 대를 이어 보여준 각별한 예우가 존재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역사의 소름 끼치는 복선이자 재현이었다.
결국 할아버지 문윤국이 정선의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새겼던 사랑과 화평의 씨앗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종손자 문선명이 피땀으로 평양의 길을 닦고, 그의 조카인 문재인을 거치면서 마침내 남북 화합이라는 민족사의 거대한 대하드라마로 찬란하게 피어난 것이다."
정주의 정신은 영원히 흐른다
정주의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정선의 깊은 골짜기에서 고결한 침묵의 유산을 남긴 문윤국, 할아버지가 남긴 불굴의 정신을 핏줄로 이어받아 흥남의 죽음을 뚫고 살아나와 세계 평화와 대북 라인의 초석을 다진 문선명,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실향의 아픔을 딛고 국가 수반으로서 평양 땅에 평화의 메아리를 울린 문재인.
이 세 인물의 궤적은 단순한 족보의 기록을 넘어, 일제강점기, 6·25 전쟁 그리고 남북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했던 순간들을 오롯이 관통해 온 역사의 산증거다.
비록 지상에서의 물리적 만남은 허락되지 않았을지라도,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그들이 짊어졌던 시대의 십자가와 불굴의 정신적 유산은 이 강산에 거대한 뿌리가 되어 역사 속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다.
[기자 메모] 역사는 때로 극적인 대면보다, 엇갈린 시공간 속에서 더 푸르게 타오르는 내면의 불꽃을 보여준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서로의 생사조차 모른 채 정선의 은둔 지사로, 부산의 토굴 구도자로 남았던 문윤국과 문선명의 엇갈림은 한국 현대사가 가진 가혹한 비극성의 방증이다.
그러나 물리적 만남이 없었기에 그들이 공유한 ‘하늘의 정신’과 ‘불굴의 유산’은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욱 순수하고 거대하게 대물림될 수 있었다. 뿌린 자의 침묵과 거둔 자의 피땀이 하나로 연결되어 남북 화합의 정점에서 꽃을 피워낸 이 장엄한 연대기 앞에서, 우리는 시대를 이끄는 거대한 역사의 섭리를 엄숙히 목격하게 된다.
문윤국 애국지사의 한시 하나를 소개하며 본 연재를 마칩니다
本是天涯羈旅客 (본시천애기려객)
異鄉擾擾十年間 (이향요요십년간)
世情未免前秦俗 (세정미면전진속)
萍跡已歸古蜀山 (평적이귀고촉산)
清風有約時時動 (청풍유약시시동)
明月不期夜夜還 (명월불기야야환)
戶外未聞多少事 (호외미문다소사)
浮雲榮辱我何關 (부운영욕아하관)
羈旅客 (기려객) 객지에 매여 사는 나그네
- 금산(錦山) 문윤국(文潤国)-
본디 하늘 끝 떠도는 나그네 신세 되어,
낯선 타향 어지러운 세월 속에 십 년을 보냈구나.
세상인심은 아직 진나라의 옛 풍속을 벗어나지 못했고,
부평초 같은 이 내 발길은 이미 옛 촉나라 산으로 돌아왔네.
맑은 바람은 약속이나 한 듯 때맞춰 불어오고,
밝은 달은 기약하지 않아도 밤마다 다시 찾아오누나.
문밖의 세상만사 들려오지 않으니,
뜬구름 같은 세상의 영화와 욕됨이 나와 무슨 상관이랴.
-끝-
―― 기획연재 독립운동가 문윤국을 최종회 17회로 마침니다 ――
【企画連載:独立運動家 文潤国 ⑰ 最終回】 孫・文鮮明に受け継がれた不屈の精神的遺産
旌善の隠棲と釜山の土窟、ついに すれ違った二大巨頭の足跡
地上での相逢は叶わなかったが、定州の血脈で繋がった偉大なる思想の継承
【ローカル世界=李勝敏 記者】 1950年代初頭、砲火が韓半島を覆い尽くした過酷な戦乱の時期、南平文氏定州家門の二大巨頭である文潤国と文鮮明は、南韓の地における互いに異なる座標の上で、それぞれの神聖なる闘いを続けていた。1921年、一族の親戚や信徒たちを説得し、全家産である巨額7万ウォンを上海臨時政府の資金として捧げた後、日帝の厳重な標的となった文潤国志士。彼を逮捕せんとする日帝警察や機密機関の包囲網は、日に日にその息の根を締め付けていた。
死線を越える緊迫した追撃戦の中で、文志士は日警の逮捕網を潜り抜け、時には上海の暗い密室へ、時には忠清北道の怪山や江原道の江陵など、朝鮮の最も深い奥地や険しき地へと身を隠さねばならなかった。解放を迎えるまで、名を変え身分を隠して昼夜を問わず密行を続け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の息詰まる潜行の歳月は、家族さえも彼の生死を知り得ないほど、孤独で悲壮な闘いであった。
解放空間の狂気を背に、高潔なる隠棲へ
ついに、あれほど切望していた解放を迎えたものの、祖国は左右の凄惨な流血対立と親日警察の復活という、さらなる混沌と狂気に直面していた。解放された祖国において、数多くの独立運動家や上海臨時政府の出身者たちが大臣(長官)や国会議員職に就き、堂々と政界の前面に躍り出る中、唯一、文潤国志士だけは深い懊悩(幻滅)を抱いたまま、再び急ぎ足で歩みを進めた。
故郷である平安北道定州の共産化と、曹晩植先生の抑留という悲劇の中で、失郷の痛みを抱いて南下した彼にとって、独立とは解放後の権力や名誉という代償を求めた闘い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同胞同士が刃を交える世俗の華やかな権座や派閥政治に背を向け、「右手のすることを左手に知らせるな」という徹底したキリスト教的信条と文士の節義を守り抜くため、彼は1946年から江原道旌善郡北坪面の長熱里およびノルモク一帯の深い山谷へと入り、身分を隠したまま、高潔なる沈黙の隠棲生活を続けた。
凡内谷(ポムネゴル)土窟の求道者と、旌善の危険極まりない戦線
同じ時刻、彼の従孫(親族の孫)である青年・文鮮明(文鮮明)は、3・8度線の遥か彼方、北韓の興南監獄における過酷な拷問と、死の収容所の死線を潜り抜けて脱出し、南下していた。1951年1月、釜山に到着した文鮮明は、凡内谷の過酷な土窟で伝道を開始し、1952年には『原理原本』を執筆、1954年にはソウルで「世界キリスト教統一神霊協会」を創立するなど、教団の基盤を固めることに全精力を注ぎ込んでいた。
当時、江原道旌善は北韓軍第2軍団の敗残兵や李鉉相部隊などのパルチザン(赤軍)勢力が跋扈し、民間人の出入りが極度に統制された、危険極まりない最前線であった。釜山やソウルを中心に活動していた文総裁が、縁もゆかりもない旌善の火田民の村を捜し歩き、隠棲中の従祖部(大叔父)に巡り会う物理的・時間的な可能性は皆無に等しかった。二人はついに、地上で相逢うことはなかった。しかし、このすれ違った時空の距離は、戦争が残した過酷な悲劇であると 同時に、家門が抱く思想の継承をより厳かに証明する背後となった。
血は水よりも濃し、血脈を伝い流れる思想の継承
たとえ地上では生死すら知らぬまま、ついに相逢うことは叶わなかったものの、定州の五山学校で祖父・文潤国が蒔いた民族精神と徹底したキリスト教的信条は、孫・文鮮明の血脈を通じてそのまま息づいていた。文潤国志士の生涯は徹底して無名(無名)の道であったが、彼が日帝の獄舎や解放空間の左右対立の中で血の涙を流しながら守り抜いた潔白な度量と厳格な信仰信条は、孫へと厳かに相続された。
文鮮明総裁は生前、数々の講演や証言を通じて、従祖部である文潤国牧師の五山学校時代における業績や臨時政府への資金支援の事実を高く称え、誇りとしていた。それらの証言の多くは、「祖国のために名も光もなく家門と財産を捧げ、辛苦を舐めて去られた立派な先祖」という死後の追慕と記憶の形をとっていたが、霊的共感の密度は、いかなる物理的な対面よりも熱いものであった。
祖父が日帝や共産パルチザンの狂気を前にしても、「私が代わりに死のう」と言って村の青年たちを守り抜き、漢学と愛の思想を教えたその崇高な気品は、孫・文鮮明に至り、恩讐までも、はら(同胞・兄弟)として抱き抱える巨大な「世界平和運動」として燦然と開花したのである。
旌善の沈黙から平壌の平和へ、無限に拡張された霊的領土
文潤国志士が1958年 1月、旌善の寂れた居処で静かに崩御した時、彼が遺した数多くの漢詩や書跡の作品は、高潔なる沈黙の果実として旌善の地に刻まれた。そして、その霊的な肥やしを自らの糧とした孫・文鮮明は、冷戦の壁がいまだ強固であった1991年 12月、命を賭して北朝鮮・平壌の心臓部へと足を踏み入れる偉大なる決断を下す。
かつて青年時代、平壌内務署や興南監獄において共産体制から血の滲むような辛苦を舐めさせられたにもかかわらず、文鮮明は祖父が旌善の夜空に捧げた「同胞へ向けた超理念的和平の祈り」と天の意思を胸に抱き、宿敵であった金日成主席と会談し、互いを「兄」「弟」と呼び合う劇的な義兄弟の契りを結んだ。
恩讐を愛へと溶かし、平和自動車を興し、普通江ホテルを建立して北朝鮮の地に比類なき信頼の資産を植え付けた文鮮明の歩みは、ソウルの華やかな権座を捨てて荒野で地行合一を説いた祖父・文潤国の大局的な度量と、完璧なる一致を見る歴史の巨大な共鳴であった。
大いなる摂理の伏線、綾羅島に繰り広げられた家門の奇跡
歴史は、人間の計算を遥かに超越した精緻な摂理の地図をもって、種を蒔いた者と実りを刈り取る者の偉業を繋ぐ。文鮮明総裁が金日成主席との義兄弟の契りを皮切りに、北朝鮮最高指導部と代を重ねて築き上げてきたその巨大な平和の道と、霊的・経済的領土の上で、歳月を経た2018년、文鮮明の防系の甥にあたる文在寅(前大統領)が、大韓民国の最高首脳として平壌・順安空港に降り立つこととなる。
南平文氏定州家門の大同行列字の規定を基準に据えれば、二人は氏族の根幹において、行列(世代)が一つ異なる「おじと甥(宿姪)」の関係にある。族譜上「明」の字の行列を用いる文鮮明総裁は、南平文氏の第31世孫であり一族の「おじ(叔行)」にあたり、「在」の字の行列を用いる文在寅は、第32世孫で「甥(姪行)」の世代に位置する。
この家門的な背景を背負い、文在寅が15万の平壌市民が集う綾羅島スタジアムの教壇に立ち、平和の演説を迸らせたその驚異的な舞台は、決して一人の政治家個人の力だけで解き放てる閂ではなかった。一族のおじにあたる文鮮明が平壌の地を踏み締めながら植え付けた壮大な信頼の資産と、北朝鮮指導部がその家門に対して代々示してきた格別の礼遇が存在したからこそ、初めて現実となった歴史の鳥肌立つような伏線であり、一種の確固たる再現であった。
結局のところ、祖父・文潤国が旌善の土床に木の枝で刻みつけた愛と和平の種は、決して消え去ることはなかった。従孫・文鮮明が血汗をもって平壌の路(道)を拓き、その甥である文在寅を経て、ついに南北和合という民族史の巨万なる大河ドラマとして燦然と花開いたのである。
定州の精神は永遠に流れる
定州の万歳運動を始まりとし、旌善の深い谷間で高潔なる沈黙の遺産を遺した文潤国。祖父の遺した不屈の精神を血脈に受け継ぎ、興南の死を潜り抜けて生き動き、世界平和と対北ラインの礎を築いた文鮮明。そして、その土台の上で失郷の痛みを乗り越え、国家元首として平壌の地に平和の残響を響かせた文在寅。
この三人の軌跡は、単なる族譜の記録を超え、日帝強占期、6・25戦争(韓国戦争)、そして南北首脳会談にいたるまで、大韓民国近現代史の最もドラマチックであった瞬間を余すところなく貫いてきた歴史の生き証人である。
たとえ地上における物理的な相逢は許されなかったとしても、互いに異なる時空の中で彼らが背負った時代の十字架と、不屈の精神的遺産はこの江山を支える巨大な根となり、歴史の中で脈々と、かつ滔々と流れている。
【記者メモ】 歴史は時に、劇的な対面よりも、すれ違った時空の中でこそ、より青々と燃え盛る内面の火花を見せつける。戦争の砲火の中で、互いの生死すら知らぬまま旌善の隠棲志士として、釜山の土窟求道者として残った文潤国と文鮮明のすれ違いは、韓国現代史が抱える過酷な悲劇性の防証(証左)に他ならない。
しかし、物理的な交わりがなかったからこそ、彼らが共有した「天の精神」と「不屈の遺産」は、時空の限界を飛び越え、より純粋かつ巨大に受け継がれることができた。蒔いた者の沈黙と刈り取る者の血汗が一つに繋がり、南北和合の頂点で花を開かせたこの壮大な年代記の前で、私たちは時代を牽引する巨大な歴史の摂理を、厳粛に目撃することとなる。
文潤国 愛国志士の漢詩を一つご紹介し,【企画連載 独立運動家 文潤国】を締めくくります。
羈旅客
- 錦山 文潤国-
本是天涯羈旅客 異鄉擾擾十年間
世情未免前秦俗 萍跡已歸古蜀山
清風有約時時動 明月不期夜夜還
戶外未聞多少事 浮雲榮辱我何關
もとより 天の果てを行く 流浪の身となり、
見知らぬ他郷の 喧騒のなかに 十年の歳月が流れた。
世の人の心は いまだ秦の古き習俗を脱せず、
浮き草のごとき 我が足跡は すでに古き蜀の山へと行き着いた。
清らかな風は 約束でもあるかのように 時折吹き渡り、
うららかな月は 約束せずとも 夜ごと巡り来る。
門の外の 浮き世の出来事は 何ひとつ聞こえず、
浮かぶ雲のような 世の栄華や恥辱など 私に何の関係があるだろうか。
―― 企画連載「独立運動家 文潤国」〈全17回〉 完結 ――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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