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은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다. 1892년 전차가 서울에 처음 등장했을 때, 전차는 길의 의미를 바꾼 근대성의 징표였다. 버스, 택시와 함께 대중교통의 상징이지만 지하철엔 시대를 반영한 고유문화가 있다. 전동차 안팎은 수많은 광고가 부착돼 있고, 출입구 인근 상점들은 소비의 욕망을 연결하는 공간이다. 독서 공간이자 문화·레저의 안내자이기도 하다.
문제는 일그러진 일부 젊은 세대의 의식이 극명하게 표출되는 장소가 됐다는 사실이다. 최근 ‘지하철 담뱃불녀’와 ‘지하철 막말남’ 등 패륜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서글픈 풍속도다. 예컨대 다리를 꼬고 앉은 20대 남성의 구두가 옆자리 노인의 옷에 닿으면서 일이 벌어졌다. 노인이 “불편하니 치워 달라”고 하자, 청년은 “오늘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나와! 나이 처먹고 뭐 하는 거야”라며 욕설을 쏟아냈다. 청년은 행패를 말리는 60대 남성에게도 난동을 부렸다. 이뿐 아니다.
말은 인격인데 예의 없는 ‘막말’ 시리즈에 충격
옆자리의 아이가 예쁘다고 어루만진 할머니가 젊은 아이 엄마에게 1.5ℓ 페트병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지난해 말에는 20대 여성이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할머니에게 “나 곧 내리니까 그 때 앉아” 라고 높은 톤으로 대들었다. 할머니가 “말조심해, 그러는 거 아냐”라고 타일렀지만 욕설만 듣는 등 물의를 빚었다.
지하철에서 봉변을 당하는 쪽은 대부분 어르신들이다. 가슴이 시리다. 동물의 왕국이 따로 없다. 남에게 상처줘서 자기 영역을 차지하려는 건 동물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인성(人性) 실종! 그렇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오른 동영상 속 모습들을 볼 때면 우리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게 분명하다. 전통적으로 경로효친과 예의범절을 중요시하게 여겼던 대한민국의 정서 때문일까. 동영상을 지켜보는 누리꾼들은 분노하고 씁쓸해하기도 한다. 이처럼 막말남녀 등이 우리 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사회 권위의 붕괴를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떼를 쓰고 주장하면 통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데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지도층이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고 밀어붙여 과실을 얻는 과정이 대중에게 노출되면서 사회적 권위가 무너졌다. 대중은 이를 따라 아주 작은 손해도 참지 않으려하고 자기의 이익을 먼저 세우게 된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특히 정치인들이 자기주장만 외치다 보니 권위를 가진 집단이 사라져 버렸다고 하겠다. 과거에는 정부의 말이라면 믿었는데 지금은 믿지 않는 것이 그 증거일 수 있다.
인터넷시대 언어 순화 위한 사회적 노력 절실
자기가 사지도 않은 물건 값을 환불해 달라고 했던 ‘백화점 진상녀’ 같은 경우도 ‘떼쓰고 주장하면 통한다’라는 인식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억지 부리면 먹힌다는 인식은 정치인 등 지도층 인사들이 만든 것이다. 정치인들이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것이나 억지를 써서 성공하는 모습이 사회 전체로 파급돼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남에 대한 배려는 없고, 자신의 잣대로 자신의 생각과 이익을 우선하는 세태인 것이다.
방송 등 대중매체의 책임을 빼놓을 수 없을 터이다. TV는 자라는 아이에게 칠판 같은 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불륜과 복수, 저주의 기운이 넘치는 ‘막장 드라마’가 안방을 꿰차는 것은 걱정스럽다. 언어 순화를 위한 방송의 노력이 중요하다.
한글은 한반도를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큰 자긍심이다. 2009년 인도네시아의 한 소수민족 언어인 찌아찌아 말을 한글로 표기하고, 남미 볼리비아의 아이마라 족과도 한글 보급 협약이 맺어졌다. 나라 밖에서는 우리글과 말이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데, 나라 안에선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막대한 파급력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거름망이 없는 인터넷 시대다. 이런 때일수록 막말과 비속어가 일상화된 품격 없는 말이 설자리가 없도록 언어예절을 되살리기 위한 사회적 합의와 노력이 절실하다. 말은 인격이요 국격(國格)이다.
- 기사입력 2012.03.23 (금) 13:50, 최종수정 2012.03.23 (금)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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