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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누락된 왕들을 찾는 방식이 '삼국사기'에 이름이나 묘호(廟號)가 두 가지로 불리는 것을 기반으로 삼았으니, '삼국사기'에 태조대왕이 국조왕이라고도 불렸고 이름 역시 궁과 함께 어수라고 했다는 기록에 주목했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태조대왕」 사론에 ‘후한서'에 안제 원년(121)에 고구려왕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즉위하였다. 현토 태수가 이 기회에 공격하자고 하였지만, 진충이 그렇게 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니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후일을 택하자고 하여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또한 '해동고기(海東古記)'에서는 고구려 국조왕 고궁은 나이가 일곱 살로 즉위해서 국모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에 친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었고 왕위에 있은 지 94년이다’라고 하면서, '한서'와 고기의 기록이 서로 다른데 '한서'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남기며 해동고기가 맞는다는 식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위의 기록은 이웃 나라 왕이 죽을 때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닌데, 전쟁을 고민할 정도로 중차대한 국가 문제로 다루었으니 잘못 기록할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궁의 죽음이 평범한 죽음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고구려본기」「태조대왕」 80년(132) 7월에 ‘수성이 왜산에서 사냥하고 측근들과 잔치를 열었는데 미유 등이 수성에게 말하기를, “이전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신하들이 재사를 왕위에 앉히려 하였으나, 재사가 자신이 늙었다고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동생이 잇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왕이 이미 늙었는데 왕위를 넘겨줄 뜻이 없으니 계획을 세우소서.”라고 하였고’, '삼국사기'「고구려본기」「태조대왕」 94년 7월에 '수성이 사냥하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내 나이도 저물어 가니 기다릴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책략을 세워주기 바라노라”고 했다.’
이 두 기록을 보면 태조대왕이 죽으면 동생인 차대왕(수성)에게 왕위가 승계되어야 하는데, 태조대왕이 죽지 않고 양위도 하지 않으니 차대왕이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서 반란을 준비하라고 명한 것이다. 태조대왕에게 두 아들이 있음에도 동생인 차대왕이 형이 양위하지 않아 반란하겠다는 것은 당연히 왕위를 승계할 이유가 있음을 피력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태조대왕 역시 왕위에 있다가도 은퇴할 나이인 76세 된 동생 수성에게 순순히 양위한 것을 보면, 차대왕이 왕위를 승계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에서는 121년에 궁이 죽고 수성이 즉위했다고 했는데, 그때는 '삼국사기'에 태조대왕이 수성에게 양위했다고 기록한 서기 146년에 비해서 25년이나 빠르다.
이 문제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그 해에 고구려왕 궁이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리고 김부식은 삭감시키고자 하는 왕 중 한 사람인 국조왕(國祖王)이 나라의 기반을 세운 왕에게 붙여지는 묘호인 태조(太祖)대왕의 묘호와 어울리는 틈을 이용하여 혼합 기록함으로써, 국조왕을 태조대왕과 혼합하는 방법으로 고구려 존립연대를 삭감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구려 국조왕의 이름은 궁이었으며 국조왕이 죽고 그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이 태조대왕 어수라는 것이다. 김부식이 사료로 참고했던 '해동고기'에도 국조왕이라 쓰고 이름을 궁이라고 했으니, 121년에 죽은 것은 국조왕 궁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조왕의 죽음은 정상이 아니었고, 태조대왕을 추대하기 위한 모종의 사건이 있었으며, 국조왕을 몰아내고 태조대왕을 즉위시킨 중심에 섰던 것이 바로 차대왕(次大王)으로, 차기(次期) 왕의 자리를 약속받아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후한서'에 궁이 죽고, 어수가 아니라 수성이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한 것도 그때 가장 전면에 나선 사람이 바로 수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나이를 먹어도 왕이 죽지 않자, 왕이 되어야 한다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켜 태조대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할 기록으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차대왕」2년(147)에 ‘2월에 미유를 좌보로 삼았다.’고 함으로써 자신에게 왕위 찬탈을 건의한 미유를 최고 요직에 기용한 기록이나, '삼국사기'「고구려본기」「태조대왕」에 ‘94년(146) 겨울 10월에 우보 고복장(高福章)이 왕에게 아뢰기를, “수성이 장차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그를 죽이십시오.”라고 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삼국사기'「고구려본기」「차대왕」에는 ’차대왕 2년 우보 고복장을 죽였다.’는 기록들은 차대왕이 왕위를 찬탈한 것임을 증언한 것이다. 또한 즉위 3년 차에 태조대왕의 큰아들 막근을 죽이고 동생 막덕이 자살한 것만 보아도 왕위 찬탈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태조대왕이 일곱 살에 즉위하여 94년을 집권하였다는 것을 보면, 국조왕이 누구이며 언제 즉위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태조대왕과 국조왕의 치적과 재위 연수까지 혼합하기 위해서 일곱 살에 즉위했고 94년을 집권했다고 적은 것으로 보인다. 손영종은 '삼국사기'에 누락된 왕 중에서 유류, 여률, 막래, 애루 등 네 명을 찾아냈다고 했는데, 태조대왕과 얽힌 국조왕 역시 누락된 왕 중 하나이며,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누락된 마지막 왕일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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