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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오키나와야말로 아시아의 하와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섬일 뿐만 아니라 우리 한반도와 중국, 일본은 물론 호주와 뉴질랜드 등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길목의 교통 요지로, 고대부터 왕국이 존재하다가 1429년 통일제국 류큐 왕국이 수립된다.
조선시대 대학자이신 신숙주 선생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유구국(流球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왕국으로,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보유한 선진문화 왕국이다.
신숙주 선생이 기록한 ‘유구국’을 요약하면, ‘나라가 남북은 길고 동서는 짧으며, 여러 섬이 늘어서 있는데 다스리는 섬은 대략 36개이다. 토산에서는 유황이 생산되는데 채굴한 지 1년이 되면 갱에 가득 차서 아무리 채취해도 끝이 없다. 논에서 일 년에 두 번씩 수확하는데, 매년 11월에 파종하여 3월에 모내기하고 6월에 수확한 후 곧 다시 파종하여 8월에 모내기하고 10월에 또 수확한다. 땅은 좁고 인구가 많아서 바다에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이가 많다’라고 했다.
글자 그대로 일년내내 파종과 수확을 반복할 수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은 물론이요, 아무리 채취해도 끝없이 풍부한 지하자원과 누구든지 마음만 먹고 조건만 갖추면 배를 타고 나가서 해외 교역을 할 수 있는 천연적인 교통 요지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나라다. 다만 그렇게 요충지에 있다 보니 그 영토에 침 흘리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흠이었다.
류큐제도는 일본 남부 규슈에서 남서쪽으로 대략 650km 떨어진 곳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류큐제도에서 가장 큰 오키나와섬은 약 112㎞의 길이에 너비가 평균 약 11㎞이고 면적은 약 1,200㎢로 신숙주 선생의 표현 그대로 길고 좁은 영토다. 제주도 면적이 약 1,845㎢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비교해보면 단순히 영토로만 볼 때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듯이, 실제로 중국에 조공하며 살았다.
교통 요지에 자리 잡은 데다가 좁은 영토에서 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해외 무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나서서, 류큐 왕국은 유럽까지 알려져 유럽의 여러 나라가 교역을 위해서 찾아오기도 했다.
살기 좋고 교통 요지이나 좁고 흩어져 있는 섬으로 이루어진 영토의 현실로 인해서 군사적 강국이 되지 못한 류큐 왕국을 왜족 일본이 가까운 거리에서 가만히 두고 볼 족속이 아니다. 그러나 그 당시 명나라 시대의 중국에 조공무역을 하는 류큐 왕국을 일거에 공격하지는 못했다.
다만 1591년부터 거리상 가까운 규슈의 사쓰마번이 교역을 핑계로 류큐 왕국과 접근한 뒤 트집을 잡아서 공격하고 퇴각하고를 반복하게 했다. 중국이 이의를 제기하면 일개 지방정부의 잘못된 행위라고 변명할 속셈으로 정복 가능성을 타진했던 것이다.
명나라가 청나라로 바뀌자 다수의 섬으로 구성된 류큐 왕국의 특성을 잘 아는 일본은 치밀한 작전 하에 본격적으로 류큐 왕국 정복을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청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에, 오키나와를 비롯한 섬들에 먼저 겐요샤 낭인들을 침투시킨다.
겐요샤는 도야마 미쓰루를 수장으로 흑룡회 등의 산하 조직을 갖추고, 일본 왕실의 비호 아래 군부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해외 침공의 선두에 섰던 일본 극우 단체로,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하고 칼을 휘두르는 낭인 집단이다. 그런데 류큐 왕국에 잠입해서는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으로 행동했다.
인두세를 비롯해 세금을 과하게 부과하던 류큐 왕국이었지만, 차마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대신해서 불만을 토로함으로써 반정부 감정을 고조시키고, 눈에 보이지 않게 폭력을 사용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개인 간의 시비는 약자 편을 들고 관청과의 시비는 무조건 백성 편을 들어서 해결해 주었다.
류큐 백성들이 일본과 병합하는 것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쓰마번 군대가 왕궁을 겹겹이 에워싸고 ‘류큐 왕국 중산왕’을 무력으로 위협해서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류큐 정복의 걸림돌은 청나라뿐이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할 기회마저 찾아왔다.
대만에 상륙한 류큐인들이 현지 원주민들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청나라를 떠보기 위해서 류큐가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주장하며, 속국 백성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한다는 명분으로 1874년 대만에 출병한다.
그런데 의외로 청나라는 자신들의 영토인 대만에 일본군이 상륙한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항의하면서도 류큐 문제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관여하려 들지 않았다. 그 사건을 통해서 청나라가 류큐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이미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폐번치현을 실시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류큐 왕국 합병을 추진하여, 1879년에 완전히 복속시키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처음에는 교역을 핑계로 동지처럼 다가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상대를 정탐하고, 허점을 보면 야금야금 파고 들어가다가 극적인 순간에 잔인한 적으로 변해서 물어뜯고는 절대 놓지 않는 비열한 왜족 일본 특성 그대로 오키나와를 병탄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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