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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마을 주민들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아키히토 일왕을 환영하고 있다. 이승민 특파원 |
[로컬세계 이승민 특파원] 지난 20일,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일본 사이타마현 내에 있는 고구려마을의 고려신사 (高麗神社·)를 방문 참배했다. 역대 일왕이 이 신사를 찾은 건 처음이어서 국내외적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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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마을 주민들이 일왕을 환영하기 위해 나와 고려신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신사 입구에는 돌로 만들어진 장승이 보인다. |
일왕 부부는 마중 나온 고려마을 주민들의 열열한 환영을 받으며 고려신사를 찾았다. 고려신사의 궁사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51)는 고구려의 역사, 고려신사 계보 등 일왕의 질문에 답하면서 신사를 안내했다.
일왕 부부는 고마궁사에게 고구려인들의 일본 정착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참배를 마친 뒤 점심까지 같이 했다. 신사와 고려옛집 등을 돌아보며 3시간 반가량 머물렀다. 이어 석산화가 피어 있는 고구려 마을길을 30분간 산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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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왕 부부가 고구려마을 긴차쿠다에 있는 석산화를 바라보며 산책하고 있다. |
지난해 퇴위 의사를 밝힌 아키히토 일왕은 내년 말,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예정이다. 퇴위를 앞둔 일왕이 고구려신사를 방문한 건, 한국 측에 반성과 화해의 의미라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1989년 즉위 때부터 “(방한의) 기회가 된다면 친선관계 증진에 노력하겠다”고 말해왔던 것으로 보아 퇴위 전에 한국을 방문하고 싶은 의사를 한 번 더 표했다는 추측이 더 강하다.
아키히토 일왕은 재임 기간동안 여러 차례 한국 방문을 희망해 왔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일왕의 방문을 만류하는 일본 보수세력과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측 입장 등이 방문의 발목을 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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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신사 앞에서 방문자들이 줄지어 참배를 하고 있다. |
일왕은 지난달 15일 태평양전쟁 패전일 희생자 추도식에서 “과거를 돌이켜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3년 연속 ‘반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2001년 생일 기자회견에서는 “백제 무령왕의 자손인 내 몸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하면서 “한국과 연을 느낀다” 며 백제의 후손임을 직접 밝힌 바도 있다.
또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줬다”고도 했고 “한국과의 교류는 이것만이 아니었다”며 “한국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후 3년만인 2004년에는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朝香宮誠彦王)가 충남 공주시의 무령왕릉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2005년엔 사이판의 한국인 전몰자 위령지 ‘한국평화기념탑’에 참배했고, 지난해엔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던 한국 국보 78호인 금동반가사유상을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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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만 보면 일본은 가까울 수 없는 먼 나라이다. 하지만, 서로의 발전을 위한 파트너라고 생각하면 ‘가깝고도 가까운’ 게 한국과 일본이다. 아키히토 일왕을 한국에 초대해 냉각된 한일관계를 개선하는 기회로 삼자는 지적도 있다.
또한 일본 속에 고구려(高句麗) 마을 로 불리는 이곳은 한국과 일본이 공존하는 땅이다. 이곳에서 한·일 정상이 만나 양국의 현안과 미래를 놓고 진지한 대화를 가져주길 바라는 이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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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강이 고구려마을을 가로질러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
한편,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 666년에 사절단으로 일본에 온 고구려 왕족 약광(若光)은 고국이 망하자 돌아가지 못하고 도쿄를 중심한 주변 일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망명객과 유민 1799명을 모아 716년 고려군을 설치해 다스렸다.
철을 다루는 기술, 말타기, 농업기술, 건축, 미술 등의 고구려의 선진문물을 원주민들에게 전하고 발전시키면서 함께 살아갔다.
약광왕은 유태인들에게 모세와 같은 존재였다. 후대에 백성들은 신사를 세워 그의 위덕을 기렸고 고려명신으로 우러러 오늘에 이르렀다. 1300년이라는 긴 세월 당당하게 고구려 후손임을 밝히면서 조상을 섬겨온 이곳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고구려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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