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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조후시에 있는 기온지 본전.(사진= 이승민 특파원) |
그 해답을 기온지(祇園寺)에서 찾았다. 도쿄에는 옛 고구려인들이 살았던 노가와(野川)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강이 있다. 이 강 양쪽으로 진다이지와 기온지가 있다.
노가와를 흐르는 물은 고쿠분지시(国分寺市)에서 고가네이시(小金井市), 미타카시(三鷹市), 조후시(調布市), 고마에시(狛江市), 세타가야구(世田谷区)까지 이어지고 후타코바시(二子橋) 아래에서 다마강(多摩川)과 합류한다. 옛 고구려인들은 이 강줄기를 따라 삶의 터전을 잡고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살았다.
노가와 지역에는 진다이지와 고하쿠 신사가 있다. 만공상인이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만공상인에 의해 창건된 또 하나의 사찰 기온지에 대해 아는 이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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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지 문간에 서 있는 문인석상. |
기온지에 들어서면 문간에서 푸근한 표정으로 한 쌍의 문인석상이 반겨준다. 문인석상은 한반도에만 존재하는 석상이다. 경내 오른쪽으로 각마당, 왼쪽으로 약사당, 정면에는 본당이 있다. 기온지에도 진다이지와 같은 창건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충청남도 온양 온정리에 사는 우근이라는 백제 사람이 일본에 와서 이 마을의 호랑이 처녀와 혼인해 딸을 하나 낳았다. 딸이 혼기가 됐을 때 고구려인 복만이라는 총각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근본을 모르는 총각과 사귀는 것을 반대한 부모는 근처 호수의 작은 섬에 집을 지어 딸을 가두고 바깥출입을 금지시켰다. 곤란해진 복만이 심사대왕에게 기도를 하자 거북이가 나타나 등에 태워 딸이 있는 섬에 데려다 주었다. 이에 부모는 결혼을 허락했고 여기서 사내아이를 낳아는데 이름을 만공이라고 지었다. 만공은 자라 부모님의 뜻에 의해 불교에 귀의하여 당나라로 건너가 법상종을 터득한 후 돌아와 기온지를 지어 부모님의 명복을 빌었다.'는 기온지 창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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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쿠이 씨족의 묘지와 비석들. 선명하게 한자로 온정가의 묘라고 적혀 있다. 앞에는 만공상인 후손들의 묘비가 있다. |
기온지에는 누쿠이 가문의 묘가 있고 ‘만공상인자손역대묘지’라고 쓴 비석도 함께 있다. 조상의 고향 온정리(温井里)를 성으로 사용하여 누쿠이(温井)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고 만공상인의 자손들 묘가 함께 있어 그의 후손이 번성했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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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상인자손 역대묘지라고 선명하게 적혀있다. |
누쿠이 가문은 일본의 중세 호족으로 정권의 중심에 섰던 한 시대의 세력가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이 부근에는 고구려인이 거주했음을 알려주는 고마에 (狛江·고구려라는 뜻)라는 도시가 있고, 고구려인들의 성씨로 알려진 고마씨(高麗氏)와 가네코씨(金子氏)가 많이 살고 있다. 특히 이 지역에는 고구려 고분이 많이 발견돼 고구려 고분군락지(狛江古墳群)으로도 유명하다.
진다이지에는 진다이지 창건 10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의문의 백봉불이 있다. 그런데 그 의문이 기온지에서 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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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지 전경. |
이 지역 출신의 향토사학자 오쿠보 기요지는 그의 저서 ‘진다이지의 역사’에서 ‘진다이지 백봉불의 수수께끼의 해답은 기온지 약사당의 비불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그는 진다이지 창건 전에 있었던 기온지는 이 지역의 개척자 누쿠이 우근의 저택이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진다이지 창건자 만공상인의 할아버지 누쿠이 우근은 불교에 심취했으므로 한반도의 불교기술로 만들어진 백봉불을 들여와 집에 안치하고 모셨다. 조부모가 돌아가시자 손자 만공은 부모의 뜻에 따라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불교를 공부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부모마쳐 돌아가시고 안계셨다. 만공은 조상과 부모의 명복을 빌기위해 조부모로부터 살아온 저택을 개조하여 기온지를 창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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