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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일본은 만주에 독립국 건국을 위해서 먼저 엄청난 투자를 한다. 1920년대에 만주에 투자된 외국 자본 중에서 일본 자본이 약 70%다. 일본이 가장 많이 투자한 곳은 만주철도 건설비용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을 기지로 삼아 중국대륙과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수송을 수월하게 하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철도에 투자한 이유가 단순히 전쟁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의 만주에 교통기반시설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것은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벌였다가 패전하더라도 만주만큼은 수중에 넣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만주를 손아귀에 넣어도 교통수단이 있어야 개발할 수 있으며, 그래야 만주를 기반으로 다시 중국 본토를 노려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음에는 일본 군부가 그동안 지원해오던 만주 최고의 권력 장쭤린을 제거한다. 직접 만주 지배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관동군 참모들이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베이징에서 천진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타고 오던 기차를 폭파하여 그를 암살하였다. 그리고 장쭤린의 암살로 인해서 그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이 지위를 계승하고 아버지의 죽음이 일본의 짓임을 알기에 국민당 정부에 합류하자, 일본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철도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그 사건이 장쉐량 지휘하의 중국군에 의한 소행이라고 몰아붙이며 만주 침략을 개시했다.
1931년 10월 장쉐량의 거점인 요녕성(遼寧省) 서부 금주(錦州 : 진저우)를 폭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1932년 1월 금주를 점령하고, 2월에는 하얼빈을 점령하여 만주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미 1924년에 베이징에서 탈출시켜 천진(天津 : 텐진)의 일본 조계지에 망명 중이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부의(愛新覚羅溥儀 : 아이신기오로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삼았다. 1932년 3월 1일 신경(新京 : 신징=지금의 장춘)을 수도로 만주국 행정위원회가 건국을 선포하고 3월 9일 푸이가 대동이라는 연호를 쓰는 국왕에 취임하여, 중국대륙에 자리 잡은 중화민국과는 완전히 별개인 새로운 국가 만주국으로 출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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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 만주(현 중국행정구역 표시) |
일본이 일본 군부의 지원을 받아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장쭤린을 제거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만주국의 수장으로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대외적인 명분 세우기다.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다가 중화민국에 의해 멸망했으나 만주의 마지막 왕국이었으니, 청나라 마지막 황제를 내세우면 청나라 후손들이 만주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워 재기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만주의 영토권 문제다. 만주의 영토권은 한족 중국과는 상관없다는 것은 ‘대고려국’ 건국을 계획할 때부터 인정했던 것으로, 청나라와 우리 한민족 간의 문제라는 것을 확실하게 못 박음으로써 추후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더라도 한족 중국과의 영토권에 대한 충돌의 소지를 없애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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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만주국(현 중국행정구역 표시) |
[그림 1]은 원래 만주의 간도에 연해주가 포함되는 것임으로, 간도를 세분하여 표시한 만주 전체의 지도에 중국이 강점하며 설정한 행정구역을 함께 표시했다. [그림 2]는 만주국의 영역으로 역시 중국이 만주를 강점하며 나눈 행정구역을 함께 표시했다.
그림에서 보듯이 만주국의 영역은 만주에서 연해주를 제외한 것이다. 연해주는 원래 대한제국의 영토로 만주에 포함되는 간도의 일부였으나, 1860년 베이징조약을 통해 제2차 아편전쟁을 중재해준 대가로 청나라가 자신들 마음대로 러시아에 할당해 주는 바람에 그 당시에는 소련이 강점하고 있던 터라 만주국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만주국의 영역은 앞서 기술한 ‘대고려국’의 영역에서 소련이 지배하고 있는 영역을 제외한 영역과 유사하다. 결국 만주국은 겐요샤가 주축이 되어 건국을 추진하던 ‘대고려국’ 건국 계획이 무산되자 추진 주체만 일본 군부로 바뀌어 건국한 나라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음 회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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