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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지금까지의 고찰에 의해 북부여의 건국이 기원전 239년으로 비정(比定)되었으니,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고구려의 왕들의 재위연수를 참고로 해서, 동명왕이 부여를 얻은 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우선 동명왕은 같은 시조인 추모왕과 같이 18년을 재위한 것으로 보고, 해부루가 나이를 먹도록 왕위에 있으면서 늦게 금와를 얻었지만 동부여에서는 1년도 안 되어 죽은 것으로 보았으니, 북부여의 자리에서 오랫동안 부여 왕으로 재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의 재위연수인 37년에 비겨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왕의 재위연수를 55년으로 볼 수 있고 기원전 239년보다 55년을 빠르게 보아야 함으로 기원전 294년경이라고 볼 수 있음으로 동명왕이 부여를 통치하며 생활터전으로 삼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300년 전·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 강인숙은 “'사기'「화식열전 오씨라조」에는 진나라 시황제 때 오씨 현의 ‘라’라는 사람이 주변나라들과 장사를 하여 큰 이득을 본 이야기를 하면서 조선과 함께 부여라는 이름을 썼다. 이것은 부여가 진시황제 때(기원전 246~210년)에 고조선과 함께 존재한 나라임을 말해준다. 이보다 앞선 기원전 5~3세기에 만들어진 중국의 가장 이른 지리책 '산해경'에 전한 ‘불여의 나라’의 ‘불여’는 ‘부여’와 음이 통한다. 고대국가는 족명과 나라이름에 족명이 반영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루’라는 족명이 ‘부여’라는 이름을 낳게 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산해경'에서 전하는 불여는 부여였으며 부여가 국가였다”고 했다.
'산해경'은 춘추시대부터 한 대 초기의 전해오는 이야기와 글을 모아 진(晋: 265~420)나라의 곽박이 주를 달아 오늘날에 전해지는 것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불여의 나라가 부여라는 이름이 바로 부여가 신조선과 대등한 국가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음으로, 기원전 4세기 전후로 동명왕이 부여를 차지하여 생활터전으로 삼고 기원전 3세기에 동·북부여가 건국되었다는 추정을 뒷밭침하는 것이다. 다만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고조선의 소국으로서의 부여는 북한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이미 기원전 7세기 이전으로 기원전 11세기에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었다.
한편, 신채호를 비롯한 학자들이 북부여라는 국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은 동명왕의 부여가 그 아들 해부루로 이어졌다가 해모수에 의해 점령되면서 북부여로 개명되었고, 동명왕의 아들 해부루는 갈사나로 옮겨서 동부여를 건국했다는 것에 착안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북부여와 동부여의 분립 과정에서, 해부루가 해모수를 피해 갈사나로 가서 동부여를 건국했다고 했는데 해모수의 아들이 또 해부루라고 한 데에서 생긴 의문이라고 본다.
본 연구자가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고 분석하여 얻은 결론처럼, 동·북부여의 해부루는 동명이인이고 고구려의 건국은 기원전217년이며, 북부여의 건국이 기원전239년이므로 동부여의 건국 또한 기원전 239년이고, 동명왕의 부여가 건국된 것이 기원전 300년 전·후라고 한다면 이런 문제는 모두 정리되는 것이다.
이렇게 건국된 동·북부여의 구성 민족에 대하여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 권20에서는, “예(濊)(예맥(濊貊)는 동이(東夷)의 국명이다. '광운(廣韻)'에 부여(夫餘)의 국명이라고 적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앞서 고구려 구성 민족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삼국지'「위서」 「예전」에 의하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주몽이 졸본부여 지역에서 고구려를 세웠음으로 고구려와 부여 사람들은 같은 주민들이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그 주민의 일부가 ‘예’지역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후손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자신들은 고구려 사람들과 같은 족임을 말해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부여가 같은 민족이므로 고구려의 동쪽이나 북쪽의 경계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동쪽은 동부여와 접하고 있었고, 북쪽은 북부여와 접하고 있었는데, 나라이름이 다르다고 해도 같은 민족은 같은 민족문화를 향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북쪽을 접하고 있던 북부여의 서쪽과 북쪽은 다른 민족들과 접했기 때문에 중요한 경계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 볼 때, 동부여가 갈사국 즉, 옥저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그 영역은 연해주 중부 이남과 함경도에 걸쳐 있었다는 것은 이미 규명되었다. 또한 북부여의 서쪽 경계는 서요하 일대이고, 북쪽 경계는 흑룡강까지이니, 한사군의 설치는 위만의 반란으로 불조선의 이름을 바꾸고 생겨난 위만조선에 해당하는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난하와 요하 유역의 일부를 차지했을 뿐이다. 그리고 고구려와 부여는 같은 맥족의 나라임으로, 한반도는 물론 만주의 어느 곳에도 중국문화는 자리 할 수 없었고 우리선조들의 고유한 문화가 존재했던 것이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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